다산 정약용의 ‘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 일부다. 천진암에서 즐겁게 놀았던 이야기다. 다산은 조선조 최고의 경세가 중 하나이자,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실학자다. 그가 남긴 ‘땡땡이 기록’이다. 배경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의 개울가다.
‘정사년(1797년, 정조 21년) 여름, 나는 명례방에 살고 있었다. 석류가 막 꽃을 피우고, 보슬비는 갓 개었다. 초천(苕川)에서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생각했다. 대부(大夫)는, 휴가를 청하여 윤허를 얻지 않고는 도성 문을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아뢴다고 휴가를 얻을 리 없다. 그대로 출발하여 초천에 닿았다. 다음 날 강에 그물(截江網·절강망)을 쳐서 고기를 잡았다. 크고 작은 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었다. 조그만 거룻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물 위에 뜬 부분이 겨우 몇 치 남짓했다. 배를 옮겨 남자주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당시 다산의 벼슬은 정3품 동부승지(同副承旨), 대부(大夫)다.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쯤 된다. 명례방(明禮坊)은 명동 무렵이다. 초천(苕川)은 지금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언저리다.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곳이다. 다산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와서 살았던 고향 ‘마현’이 있다. 이곳이 ‘소내(苕川)마을’이다.
이날의 ‘땡땡이’ 주제는 천렵이다. ‘배가 기울도록 물고기를 잡아서 즐겁게 먹었다.’ 이 ‘즐거움’은 참 쓸쓸하다. 불과 3년 후인 정조 24년(1800년) 6월 28일 정조 승하, 다산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몇몇 형제가 마지막으로 모였던 즐겁지만, 참 쓸쓸했던 천렵. 천렵은 여름철 최고의 ‘놀이’였다.
조선 태종 7년(1407년) 2월 ‘조선왕조실록’에는 ‘완산부윤(完山府尹)에게 전지(傳旨)하여 회안대군(懷安大君)이 성 밑 근처에서 천렵하는 것을 허락하고, 또 관가의 작은 말(馬)을 내주어 타게 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회안대군 이방간(1364∼1421)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로 태종 이방원(정안대군)의 바로 위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권력을 손에 넣었다. 회안대군은 정안대군을 상대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무참하게 패배한 회안대군은 귀양살이를 떠난다. 궁중이 시끄럽다. 죽여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험한 곳으로 유배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태종의 손에는 이미 많은 피가 묻었다. 회안대군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바로 위의 형이다. 여기저기 유배지를 옮기다가 완산으로 보냈다. 오늘날의 전주다. 집권 7년 차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 형이 유배지에서 천렵하는 것을 허락한다.
민간에서도 천렵을 즐겼다. 정경운은 조선 중기 선비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경상 지역 왜병 격퇴에 공을 세웠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 지역의 상황을 ‘고대일록’이라는 일기로 남겼다. 이 기록 군데군데 천렵이 등장한다. ‘최 별감과 함께 혈계(血溪·지금의 남계천)에서 천렵을 하였다(1594년 7월 29일)’, ‘작은 배를 띄우고 작대기로 크게 소리를 내니 눌어(訥魚·누치)가 여울을 거슬러 올라왔다. 시내 한가운데에 그물을 쳐서 89마리를 잡았다. 평생에 좋은 일이 이보다 더하겠는가(1595년 4월 8일).’ 점잖은 선비이자 의병장이 천렵으로 누치 잡은 일을 ‘평생에 더없이 좋을 일’로 손꼽았다. ‘혈계 여울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하루 종일 몇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저녁에는 여울을 가로질러 그물을 놓았지만 고기를 겨우 십여 마리 정도 잡았다. 한탄스러웠다(8월 12일)’는 심정도 남겼다.
다산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조선 후기 문신 윤기(1741∼1826)는 ‘천렵을 구경하며’라는 시를 남겼다. ‘어량에 통발 치고 돌을 물에 던지고/아이들이 앞다투어 물고기를 몰아간다/잠깐 사이 통발 가득 물고기가 팔딱이니/이번이 제일 많다 웃으며 말들 하네’(‘무명자집’).
천렵을 경계하는 이도 있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한강 정구(1543∼1620)는 후배 최은에게 천렵은 ‘헛된 작업’이라는 편지를 보낸다. ‘한 번 가면 다시 얻기 어려운 세월을, 집 짓고 천렵하는 헛된 작업으로 오랫동안 보내게 되니 어찌 진정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한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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