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석을 박차고 나가면 즐거운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작은 집을 떠나지 못한다네 하는 자조의 느낌도 있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옛말 때문에 주저앉는 무력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하는 ‘오빠 생각’이나 ‘섬집 아기’를 부를 때도 슬픈 기분이 든다. 노래뿐만 아니라 가족, 가정, 집, 부모, 형제 이런 단어는 기쁨, 행복과 함께 슬픔이나 불행도 떠오르게 한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이기 전, 구성원들은 타인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 된다는 건 가정이 가져다줄 행복과 안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약속이 아닐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사진)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극사실주의로 묘사해 나간다. 아내의 옛 친구가 하룻밤 묵으러 온다는 얘기를 들은 남자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게다가 찾아올 손님은 시각장애인이다. 앞을 못 보는 손님이 오면 볼링이나 치러 가자며 남편은 어깃장을 놓는다.
이윽고 손님이 오고 불편한 식사자리가 이어진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틀어놓은 TV에서 성당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온다. 손님은 성당의 생김새를 궁금해하고 남자는 설명을 해주지만 역부족이다. 그때 손님의 제안으로 둘은 손을 포개 잡고 성당을 그려 나간다. 눈을 감고 그려 보라는 손님의 말에 주인도 눈을 감고 그려 나간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눈을 감은 채로 있자고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행복만이 가정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시각장애인이 보지 못한 대성당처럼 눈을 뜬 사람조차도 가정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막연히 가정에 대한 환상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가족이 된다는 건 눈을 감은 채 손을 잡고 서로에게 대성당을 그려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거 진짜 대단하군’ 하며 감탄하게 되는 기적이다. 모든 가정에 축복이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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