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로서 한국 가족사를 연구하기 위해 전국에 산재해 있는 종가를 조사하던 중 한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한옥은 현대 건축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한옥의 벽은 비대칭의 균형, 자유로운 면 분할, 여백의 아름다움 등 독특한 예술혼이 살아 숨쉬고 있다.
한옥은 비대칭이다. 전통 건축물의 배치를 살펴보면 궁궐, 사찰, 서원, 향교 그리고 민간주택 등 모든 건축이 좌우 비대칭이다. 서양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건축물이 대칭 구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서양 건축은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대칭을 선호한다.
비대칭의 구성은 건축물의 배치뿐만 아니라 한옥의 벽면에서도 나타난다. 한옥의 벽은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모양의 면들이 모여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그러나 가운데를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는 벽면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언뜻 보면 대칭처럼 보이는 벽면도 양쪽에 다른 형태의 문을 배치하거나 그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비대칭을 추구한다. 그리고 완벽한 대칭을 이룬 벽면에서는 작은 소품을 다르게 설치하는 등 결코 경직되고 긴장감을 주는 대칭은 피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한옥의 벽면이다.
비대칭은 좌우가 달라 균형감을 상실할 수 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모양새는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옥 벽의 비대칭은 언제나 균형과 비례감을 가지고 있다. 대칭을 통해 균형과 비례를 이루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지만 비대칭이면서 균형과 비례를 이루는 것은 한 차원 높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한옥의 비대칭은 산만한 혼란을 야기하는 무질서와는 다르다. 한옥의 벽면은 다양한 모습의 벽면과 문이 만들어 내는 공간 구성을 통해 서로 경쟁하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감싸 안는 조화를 이룬다. 서양의 건축이 대칭을 통한 외형적인 질서라면 한옥은 비대칭의 조화를 통한 내재적인 질서라 할 수 있다.
한옥의 벽면은 자유로운 면 분할로 아름다운 한 폭의 추상화가 된다. 흰 회벽을 바탕으로 짙은 색 기둥과 보가 가로세로로 그어지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문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와 같은 면 분할은 장인의 솜씨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벽체 위에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이렇게 표현된 벽면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담백하다. 차갑고 기하학적인 서양 미술의 추상화와는 대조적으로 한옥의 벽면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따뜻하고 인간적인 추상이다. 몬드리안의 추상은 치밀한 계산 위에 재고 따져서 정교하게 작도한 추상이라면 한옥 벽면의 추상은 살기 위해 집을 짓고 문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활의 흔적이다.
여백은 단순히 비어 있음을 뜻하는 공백과는 구분된다. 여백은 빈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인가 있음을 암시하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백은 언제나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의 정신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가능성은 희망이다. 가득 채워져 있다면 이제는 지워지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여백이 뭔가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라면 채워진 공간은 더 나아갈 수 없는 절망이다.
한옥의 벽이 가지는 여백은 단순함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단순함은 절제의 구현으로서 부분을 이루는 각각이 전체적인 하나의 통일된 주체 안에서 파악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옥 벽의 색도 가장 단순한 흑백이다. 모든 색을 더하면 흑(黑)이다. 모든 색을 빼면 백(白)이다. 서양화가 컬러 유화라면 우리 미술은 흑백의 수묵화이다. 흑백은 여백의 허실(虛實)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한옥의 벽은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 비대칭이 주는 편안함, 균형이 주는 안정감,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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