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플루트를 꺼내어 불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호전적이고 권위적인 왕보다는 ‘평화로운 중재자’인 온화한 군주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실제로 플루트를 잘 연주했던 왕이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재위 1740∼1786년)입니다.
그의 플루트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플루트 소나타를 100곡 이상이나 써서 이 악기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대(大)바흐의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요한 요아힘 크반츠 같은 최고의 음악가들을 왕궁으로 불러 활동하게 했고, 대바흐의 걸작 ‘음악의 헌정’에 쓰인 주제 선율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 생활’이 처음부터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 왕비가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초빙해 그에게 음악의 세계를 열어주었지만, 성격이 강하고 완고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아들이 음악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걷어차거나 몽둥이로 두들기기도 했습니다.
‘황태자’가 선택한 탈출구는 가출이었습니다. 친한 육군 중위 카테와 상의해서 여행 중에 숙소를 빠져나왔지만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격노한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카테를 참수해 버렸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황태자는 변했습니다. 마음을 숨기고 부왕에게 순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8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어떤 왕이 되었을까요? 난폭한 아버지에 대한 저항심과 음악으로 갈고닦은 감각으로 ‘민주적 군주’가 되었을까요? 즉위 초기 그는 고문 폐지, 언론 검열 폐지, 종교 차별 금지 등 계몽주의적 조치를 잇달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야심이 강한 한 사람의 왕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개입해 널따란 슐레지엔(오늘날의 폴란드 남서부) 땅을 병합하는 등 영토를 크게 늘렸습니다. 오늘날 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데는 넓게 영토를 확보한, 광개토(廣開土)한 업적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7일은 프리드리히 2세가 서거한 지 230년째 되는 날입니다. 시련도 겪었지만 강인했고, 무엇보다 예술을 사랑했던 왕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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