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원서 표지 우유팩 그림을 없애고 제목 서체디자인에 집중한 ‘시각디자인’. 내용을 노출시킨 원서 표지를 국내 정서에 맞게 순화한 그래픽노블 ‘유료 서비스’, 저자로부터 “원서 표지보다 좋다”는 평을 얻은 ‘일본의 제품 디자인’(위부터). 홍디자인·미메시스 제공
“시각적 요소는 항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흐름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레이아웃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난달 출간된 ‘시각디자인’(홍디자인)은 책 서두에 기술한 이 내용을 스스로 책 편집디자인을 통해 실증한다.
이탈리아에서 2년 전 발표된 원서 ‘비주얼 디자인에 관한 휴대용 비평 노트’의 표지는 한국어본과 판이하다. 원서 표지 복판의 흰색 종이 우유팩 이미지는 “번지르르한 예술뿐 아니라 냉동식품 포장지, 약국 영수증, 전기요금 고지서도 디자인의 범주에 속한다”는 저자의 강변을 표상한다.
하지만 한국어판 편집을 맡은 디자이너는 보다 간결하게 백지와 폰트디자인만으로 표지를 구성했다. 조용범 홍디자인 실장은 “디자인 또한 번역 작업의 대상이다. 책 편집 레이아웃과 표지 이미지를 원서와 똑같이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우유팩 이미지가 유럽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한국 독자가 같은 흐름으로 전달받으리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번역본 디자이너의 판단이었다.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디자이너 주장에 따랐다. 완성된 표지를 e메일로 전달받은 원작자는 다행히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출력해 스튜디오 벽에 걸어놓겠다’고 했다.”
원작자와 저작권자도 대체로 ‘언어권이 달라지면 책 디자인도 바꾸는 게 낫다’는 견해에 공감한다. 번역 출간 계약을 맺을 때 표지 디자인이나 편집 레이아웃에 시시콜콜한 조건이 걸리는 일은 드물다. 인쇄 전에 최종 편집본 확인과 의견 교환이 이루어질 뿐이다.
종종 예외는 있다. 일본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저서의 한국어판 출간 과정에서 표지 이미지뿐 아니라 내지 레이아웃에도 꼼꼼하게 간여했다. 지난해 번역된 영국 그래픽노블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미메시스)의 저자인 일러스트레이터 스티븐 콜린스는 번역 과정에서 “내용 전달에 중요한 몫을 하는 한글 서체 디자인을 스스로 해 보겠다”고 나섰다. e메일로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조율한 끝에 결국 주요 서체는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 학생들의 작업으로 채웠다.
프랑스의 인기 추리소설 ‘매그레 시리즈’(열린책들) 저작권자는 “표지에 ‘살인, 피, 총기’ 이미지를 넣지 말라”고 요구해 번역본 디자이너들을 난감하게 했다. 작업을 맡았던 석윤이 미메시스 디자인팀장은 “고달팠지만 이야기 속 공간이나 소품을 내세운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 좋아 보람을 느꼈다”며 “가급적 원서 디자인의 좋은 요소를 살리고 싶지만 결국 ‘기대 판매부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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