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 이젠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대한민국에는 아주 많은 아들들이 살고 있다. 갓 태어난 아가부터 할아버지까지, 대략 5000만 인구의 반절이 남성이고 누군가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문정희 시인의 이 시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을 향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진짜로 이해할 사람은 아들들보다는 어머니들이다. 아들의 경우에는 시의 모든 내용이 마음속에 사무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래 아들이란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할 뿐, 전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어머니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단박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들아’라는 첫 구절을 읽는 순간 내 아들의 얼굴이 떠올라 벌써부터 마음이 동요될지 모른다. 어머니에게 아들의 이름은 참 간절했다. 그를 위해 기원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절절했다. 어려서는 근거 없이 든든했고, 까닭 없이 사랑스러웠으며, 절대적으로 귀했다. 아들은 커가면서 주로 뒷모습만 보여주었지만 그것마저 사랑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과 시선을 받으며 아들의 어깨는 넓어져 갔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그와 나 사이에는 위대한 신이 사는 것 같았다. 이 말에 많은 어머니들이 공감하실 것이다. 아들은 믿고 의지하고 지키는 종교 같았다. 그러니까 아들은 이미 축복받은 사람이고, 어머니는 이미 거룩한 사람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대해서 생각한다면 누구든 귀한 자식이니 세상에 귀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 시를 읽으면 왜 학대나 괴롭힘이라는 말, 가혹 행위나 폭력이라는 행동을 미워해야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종교 같은 사람이고, 종교 같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까 누구든 함부로 하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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