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가 시조를 지향할수록 현대시의 미래가 밝아진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현대 시·시조 통합이론’이 그것. 대학에서 30여 년간 우리 현대시를 가르친 민병기 시인이 20세기 유명한 자유시 속에 내재한 시조의 존재와 가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시론서다.
저자는 저명한 시인들의 자유시 속에 숨어 있는 시조형을 찾아서, 시조형의 높은 장점인 애송성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현대 자유시들도 이미저리(이미지군)와 의미 진술의 마디들이 조화를 이루면, 옛시조처럼 높은 애창성이 생긴다는 사실을 마디 개념으로 복원해 제시했다.
저자는 지난 세기에 발표된 자유시들에 숨겨진 시조형의 가치가 알려진다면 서구 모더니즘 시론의 영향을 받아 지나치게 난해한 산문시로 치닫고 있는 한국시단의 흐름을 바로잡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시조형에 높은 애송성이 있는 근거를 서구 이론에서보다 우리 옛시조에서 찾고 있다. 그가 밝힌 시조형의 특징은 표현과 의미가 조화를 이룬 구조, 즉 이미저리와 의미 마디들이 2 대 1로 통합된 시조형의 구조에서 조화미가 나타난다는 것.
그는 또 우리 시인들이 시조의 장점을 살려 자유시를 쓸수록 명시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서정주의 시 ‘문둥이’를 예로 들었다. 이 시는 자유시라고 하지만, 4음보율 3장의 구조에 종장 자수율까지 온전히 갖추기 있기에 사실은 시조 한 수(首)라고 해야 한다는 것. 그는 조지훈의 ‘승무’ 역시 처음 세 연은 시조 한 수라고 밝힌다.
저자는 시조형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신석정의 ‘임께서 부르시면’과 유치환의 ‘춘신(春信)’, 조지훈의 ‘낙화’처럼 시조 형식이 시의 표면에 바로 드러나면 표층시조형인 신시조라고 보았다.
반면 정지용의 ‘향수’를 비롯해 ‘구성동’과 ‘비’, 유치환의 ‘그리움 1·2’와 ‘깃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연(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등은 시조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안에 시조형이 숨어 있는 심층시조형으로 분류했다.
저자는 또 박용래와 천상병의 자유시 중에 다수도 시조형에 속한다고 밝혔다. 단시의 대가인 두 시인은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시인 중 가장 많이 연구된 인물. 박용래는 이미저리 성격의 시행들을 짧고 파격적으로 구사했고, 천상병은 의미 진술 위주의 단시들을 많이 발표했다. 언뜻 보기엔 대상 묘사에 치중한 박용래와 의미 진술 중심인 천상병의 시는 상반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시편들에 심층시조형이 많이 내재된 사실을 지적하며 시조형의 존재를 밝혔다.
희소하지만 시조와 완전히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것과 유사한 자유시들이 20세기에 많이 발표되었는데, 왜 현대시가 시와 시조로 양분되었을까. 저자는 육당 최남선이 편집한 ‘소년’지에 그 해답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시조가 노래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최남선이 최초의 근대 잡지 ‘소년’을 편집할 때 시와 시조로 나누면서 현대시가 양분되기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애송성이 높은 현대 시조형의 가치를 널리 알리면 시와 시조로 구분하는 양분법은 허물어지고, 시조가 현대시의 대명사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름난 시인들의 명시일수록 그 속에 애송성이 높은 시조형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자유시들이 다듬어질수록 완미한 시조형이 완성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애송성이 높은 시조형 시들은 번역하기도 쉽다고 밝혔다. 이 번역본들이 해외에서 시조로 소개되면, 자수율을 지닌 일본의 하이쿠보다 융통성이 많은 음보율을 지닌 우리 시조가 더욱 주목받을 수 있다고 했다. 700년 이상을 이어온 우리 시조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시조의 한류 현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바람은 과연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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