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나 이념 대립을 다룬 영화에서 ‘스파이’나 ‘간첩’이란 단어는 수없이 들어왔지만 그보다 앞선 일제강점기의 ‘밀정’은 미지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일본에 복종하든 죽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던 시기, 친일과 항일의 경계선에 선 인물들의 내면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밀정’은 그래서 더 궁금했다.
‘밀정’은 시대의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의 내면을 치밀하게 다룬다. 1920년대 말, 일제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과 이들을 쫓는 일본 경찰 사이에 벌어지는 숨 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담았다. 1923년의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황옥은 일본 경찰에 몸담은 조선인으로 의열단과 일경 중 누구를 위해 밀정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 남는 인물이다. 관객들은 항일 인사들 사이에서도 변절자가 속출하고 가까운 친구마저 밀정으로 끝없이 의심해야 했던 당시 상황을 140분의 러닝타임 동안 똑바로 마주하게 된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스케일 큰 총격전이나 반전으로 허를 찌르는 스토리가 아니다. 영화의 중심은 오롯이 등장인물들의 내면으로 쏠린다.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을 받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간부 이정출(송강호)과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은 서로의 정체를 알면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속내를 감추고 가까워진다. 가장 대척점에 선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지 않는다. 둘 사이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동질감과 각자 힘든 시기를 버텨내고 있다는 인간적 동지애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배우 송강호의 독보적인 연기력이 보태져 그간 독립군과 변절자의 관계에서 보이던 뻔한 공식을 탈피했다.
김지운 감독은 ‘김치 웨스턴’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며 관객 688만 명을 동원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년)과 한국 복수극의 끝판이라 불리는 ‘악마를 보았다’(2010년)를 연달아 선보인 지 꼭 6년 만에 한국 영화를 내놓았다.
감독은 25일 간담회에서 “서구의 냉전 시대를 다룬 스파이 영화들을 참고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콜드 누아르’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면서 “하지만 서구 스파이 영화의 시대 배경과 일제강점기는 판이하게 달랐고, 만들다 보니 점차 뜨거워지는 영화가 됐다”고 설명했다.
감독의 누아르 지향도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는 장면이 이토록 잔혹하고 노골적으로 표현된 영화가 있었을까. 이정출은 여성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의 뺨에 발갛게 달궈진 인두를 가져다 대고, 일본 경찰이 의열단 리더 김우진의 손톱을 뽑아내려 하자 김우진이 혀를 깨물고 자결하려 한다. 불편함마저 느껴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같은 감독의 전작들이 스친다. 다음 달 7일(15세 관람가) 개봉. ★★★☆(★ 5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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