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날아오르는 것. 그리고 꿈꾸는 것. 헛된 걸 알지만 상상할수록 즐거운 일이다. 꿈꾸고 도전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지속해 나가는 데 필수적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속 조너선 리빙스턴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책을 읽었던 14세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난 조너선 리빙스턴의 비상을 동경하고 여전히 그것을 소망한다. 그럼에도 ‘날아올라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디로, 언제, 어떻게 비상해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이 힘찬 날갯짓을 주저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데미안’에서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한계를 벗고 나와야 새로운 삶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은 수많은 도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매우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너선은 한계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쳤다.
‘가여운 플레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라. 눈이 보여주는 것은 다 한계가 있을 뿐이란다. 너의 이해력으로 보고 이미 아는 것을 찾아내거라. 그러면 너는 나는 법을 알게 될 게다’라며.
그는 무리에서 추방되었다. 현실에 안주하길 원했던 무리에서 쫓겨난 덕분에 비로소 한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난 것이 한계를 뛰어넘는 시작이 된 것이다. 낯익은 세상에서 안주하는 이들의 눈빛은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리빙스턴을 추방한 무리는 단지 물가의 물고기를 주워 먹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뻔한 삶만을 이야기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나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따금 낯선 곳을 찾아간다. 또 발레리나로서 20여 년의 삶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자발적으로 ‘추방된 자’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도전을 향해 날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껍데기를 깨야 하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내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도 가늠하기 어렵다. 어디쯤을 날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꿈을 꿀수록, 날갯짓을 할수록 더 멀리 나갈 것이라는 생각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분명한 건 한번 시작한 날갯짓과 무한한 꿈 덕분에 드넓은 창공을 항상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힘찬 날갯짓을 한다. 이 날갯짓을 혼자서 하고 싶지는 않다. 여러 마리의 새가 하늘을 함께 나는 것처럼 더 많은 사람과 같이하기를 늘 소망해 왔다. 함께하다 보면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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