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디자이너는 1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레고 아이디어스’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활동하는 자발적 디자이너가 12만 명에 이른다. 스스로를 레고 디자이너로 칭하는 이 레고 ‘덕후들’은 자신이 조립한 레고 블록을 웹사이트에 올려놓는다. 만약 1만 명 이상의 투표를 받는다면 제품화되어 수익까지 나눠 가질 수 있다. 최근 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유튜브 스타로 뜨고 나서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화장품까지 시장에 내놓았다. 이세돌과 대국한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는 열여섯 살 때 게임 회사에 취업해 그 다음 해 자신의 이름을 단 완성도 높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선보였다. 성공한 덕후라는 의미의 ‘성덕’이자 ‘덕질’과 ‘직업’이 일치되는 ‘덕업 일치’의 사례다.
바야흐로 덕후 전성시대이다. 1990년대 ‘오타쿠’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할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덕후’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시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덕질 하는 ‘화성인’에서 한 우물 판 전문가로, 능력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덕후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되었을까. 개인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신뢰하는 풍토도 그런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덕후는 나와 비슷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반전의 쾌감을 준다. 무엇보다 덕후는 실리가 아닌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덕후들은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뭉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 ‘없만갤’(‘없으면 만드는 갤러리’의 줄임말)은 덕후들의 성지로 떴다. 자동차, 에어컨, 전자 액자, 수제 가죽 가방, 피규어 등 분야에 상관없이 무언가 만드는 방법을 공유하며 제작 영상과 제작 후기를 올리고 있다. 몇 해 전 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8개국 덕후들이 온라인상에서 모여 오프닝 곡을 각자의 악기로 연주한 동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로의 덕력을 공유했을 때 시너지를 보여준 것이다. 스스로 콘텐츠 생산자가 된 덕후들이 뭉치자 그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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