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 A 씨(52)는 지난달 초 어머니를 여의었다. 뇌종양으로 몇 년간 투병한 그의 모친은 생전 외아들인 A 씨에게 이 같은 유언을 남긴 후 꼭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소박한 장례를 치렀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를 공개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담긴 여러 편의 글과 함께.
그의 소셜미디어에는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진심 어린 애도의 뜻을 담은 댓글도 수백 개가 달렸다. 필자도 고인의 존함이 연꽃 연(蓮)에 붉을 홍(紅)이라는 것, 도자기 공예에 관심이 많고 과일 중 특히 감을 좋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나름의 열과 성을 다해 A 씨를 위로하며 그의 고통에 아파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참석한 수많은 경조사는 달랐다. 열차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지방의 한 장례식장에 갔을 때는 촉박한 일정 때문에 빈소에 30분만 앉아 있다 귀경했다. 어떤 주에는 서울의 한 대형 병원 장례식장에 3번을 방문한 적도 있다. 고인과 유가족에겐 정말 죄송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경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각각 기차역에서 본 해당 지역 유명 제과점의 빵, 몇몇 권력자의 이름이 적힌 조화였다. 필자가 불경한 조문객인 탓도 있으나 몇몇 상주들의 태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장인상을 당한 한 지인은 발인을 몇 시간 앞두고 장례식장에 와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둘째 사위인 자신의 조문객이 너무 적어 처가 식구들 앞에서 면이 안 선다고 했다. 한밤중에 장례식장으로 차를 모는데 짜증이 좀 났다.
어느 쪽이든 망자(亡者)에 대한 추모, 남은 자에 대한 위로와 애도, 조문객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5만 원짜리 몇 장’이 대변하는 부조금 액수는 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 주는 사람에게는 훗날의 성공을 위한 눈도장에 불과했다.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을 줄이자는 움직임이 많고 ‘작은 결혼식’은 꽤 보편화했다. 하지만 유독 효(孝)를 중시하는 문화 때문인지 ‘작은 장례식’ 도입은 더딘 편이다. 단 한 번 세워 둘 조화, 수백만 원에 이르는 수의, 빈소 대여료, 매장비, 조문객 음식값 등으로 수천만 원이 우습게 나간다. 예전처럼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상을 치르지 못할망정 부모의 마지막 길을 남부럽지 않게 마련해야 한다는 압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에서 부조금 상한액이 식비, 선물 상한액보다 훨씬 큰 10만 원으로 책정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A 씨는 말한다. “저도 소박한 장례식을 치르자는 주의였지만 막상 내 일로 닥치니 주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더군요. 그간 제가 낸 부조금이 아깝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고요. 하지만 ‘남들이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볼까, 내가 낸 돈이 얼마인데…’라는 생각에 매몰되면 영원히 달라지는 게 없을 겁니다.”
모든 만남의 끝에는 이별이 있다. 각각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헤어지는 방식은 다르겠으나 하나는 분명하다. 장례식장의 주인은 ‘상주’가 아니라 ‘고인’이라는 것. 단순히 비용을 줄이고 절차를 간소화하자는 게 아니라 망자의 신념과 평소 생활방식에 부합하는 장례식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일이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는 것 못지않게 중함을 알려주신 고(故) 임연홍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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