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 밤마다 찾아오는 구렁이 과부 넋을 달래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9월 6일 05시 45분


수도암은 대웅전(왼쪽 건물)과 극락전(가운데 건물) 등 부속 건물이 몇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운람산 중턱에서 천년을 자리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고흥(전남)|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수도암은 대웅전(왼쪽 건물)과 극락전(가운데 건물) 등 부속 건물이 몇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운람산 중턱에서 천년을 자리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고흥(전남)|김진환 기자 kwangshin00@donga.com
■12. 두원면 운대리 수도암 설화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하룻밤 나눈 과부, 구렁이가 되어
밤마다 찾아와 고을 현감 괴롭혀
도승에게 암자 짓게 해 원혼 달래
수태 기도 들어주는 자궁바위도


전남 고흥군 두원면, 포두면에 걸친 운람산(雲嵐山)은 구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암산(雲岩山)으로 혼용되기도 하는 이 산은, 오래 전에는 모악산(母岳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이 어찌되었든 높이 487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골짜기가 깊어서 산꼭대기에서 부는 바람소리를 듣고 1시간이 흘러야 산 구비 구비 돌아 산 아래로 바람이 온다고 한다. 정상에서 솟은 맑은 물 또한 맥반석을 거치고 여러 약초들이 정수를 해준 덕분에 산 아래로 흘러내린 약수도 영험한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벚나무가 많아 봄에는 하얀 벚꽃들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가을에는 붉은 빛의 절경을 펼쳐낸다.

● 수도암, 중흥사의 부속 암자

수도암(修道庵)은 이 운람산 중턱에 다소곳하게 앉은 암자다. 고려 중엽 도의선사가 창건했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 ‘산의 기운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형상’이다. 수도암은 ‘중흥사’라는 사찰에 부속된 암자였다. 중흥사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재위 826∼836) 때 지어진 사찰로, 운람산 너머 포두면 상포리 평평한 땅에 건립됐다가 조선 정조시대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수도암의 주지 연제스님은 “중흥사는 비옥한 땅에 지어졌다. 세속의 눈에는 값어치가 있는 땅이었겠지. 현재 그 자리는 젖소를 키우는 목장이 됐다”고 했다.

운람산은 바위산이다. 수도암은 그 바위산 중턱에 세워졌다. 두원면 운대리에서 수도암을 오르는 길엔 도토리나무가 무성했다. 덕분에 수도암에 오르는 주변 숲은 다람쥐 천국이다.

“운람산은 바위산이라 값어치가 별로 없어 수도암도 (헐리지 않고)아직 살아남았겠지. 중흥사는 좋은 땅이었으니까 민간에 넘어가고 말았겠지만.”

● 임씨 여인의 한을 달랜 수도암

척박한 바위산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수도암에는 오래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옛날 홍씨 성을 가진 남자가 과거에 실패하고 정처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져 비를 피하기 위해 들린 집에 과부 임씨란 여인이 살고 있었다. 홍씨는 임 여인에게 비를 피하도록 해줄 것을 부탁했고, 임 여인은 홍씨에게 집으로 들어와 쉬게 했다. 그리고 홍씨와 임씨는 서로 눈이 맞아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됐다. 다음날 홍씨는 고향길로 나섰고, 임씨를 떠났다. 홍씨는 임씨를 잊고 과거를 다시 보아 급제했고, 전남 함평에 현감으로 부임해 새로운 여자와 결혼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홍씨 방에 누군가 찾아와 잠을 깨웠다. 커다란 구렁이였다. 구렁이에 놀란 홍씨가 큰 소리를 내자 문밖에 있는 부하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방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구렁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홍씨를 휘감으며 ‘여보, 나를 모르겠소?’라고 묻곤 사라졌다. 그날 이후 구렁이 때문에 밤마다 괴로웠던 홍씨는 구렁이가 임씨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평소 알고 지내던 도승에게 청하여 임씨가 살던 곳에 암자를 짓게 했다. 그 암자가 지금의 수도암이다.

● 수도암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

연제스님은 수도암에 관련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역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다.

과거를 보러 가던 한 남자가 밤을 보낼 곳을 찾다가 산 속의 한 집을 발견하게 됐다. 모녀가 사는 집이었다. 남자는 하룻밤 묵을 것을 청했고, 그날 밤 남자와 그 집의 딸은 서로에 이끌리고 말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돌아오겠다’며 과거길에 다시 올랐다. 남자는 급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다 지쳐서 죽고 말았다. 여자가 죽은 후 귀신이 되었다. 귀신은 마을에 현감이 부임할 때마다 나타났고, 하소연을 하려던 참이었지만 귀신을 본 현감은 놀라 죽고 말았다. 어느 용감한 현감이 죽기를 각오하고, 귀신과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귀신은 큰절을 올리고 저간의 사정을 하소연했다. 그리고 암자를 지어 넋을 달래주면 저승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은 암자가 수도암이다.

설화의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두 이야기 모두 남녀상열지사다.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에 대한 한(恨)으로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았고, 절을 지어 위로를 받은 후 저승으로 떠났다는 내용이다.

●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바위

수도암 좌측 산기슭에는 기이한 모양의 자궁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자식이 귀한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면 정말로 자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올해로 5년째 수도암에서 수행중인 연제스님은 실제로 2세를 가지지 못해 애를 태우다 이 곳에서 치성을 드리고 아이를 가진 사례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 아들을 낳은 신도 한 분이 얼마 전 쌀 한 가마니를 들고 오는 일이 있었다.”

믿음을 저버린 남자에 한을 품었던 여인의 사연이 깃든 수도암. 이 곳에서 기도를 올린 여인의 잉태는, 동병상련을 느낀 설화 속 여인의 선물은 아닐까.

● TIP 설화란?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 TIP 가는길



남해고속도로 고흥 IC→고흥 방면→한천교차로에서 도양·고흥 방면→동강교차로에서 동강·보성·대서 방면 우측방향→우주항공로 따라 18.67km→운대교차로에서 두원·운대리·고흥만방조제 방면 우측방향→고흥로 따라 830m→중대마을·석촌마을·수도암 방면 좌회전→중대길 따라 3.81km→수도암

고흥(전남)|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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