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지우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7일 03시 00분


저자가 일본 ‘문구왕’이라고 알려진 ‘궁극의 문구’라는 책은 개인적으로 내용보다는 목차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책의 목차는 이를테면 ‘쓰다’ ‘붙이다’ ‘지우다’ ‘자르다’ ‘엮다’ ‘재다’ ‘정리하다’ 등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로 구분되어 있다. 목차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연필이나 볼펜 같은 필기도구는 ‘쓰다’에, 포스트잇이나 풀, 테이프 같은 문구는 ‘붙이다’ 편에 수록돼 있다.

나는 문구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이 갖고 있는 특징적인 동사에 관심이 많고 또 주목하곤 한다. 연필은 잡고 쥐고 쓰고 깎다, 부채는 펴다 접다 부치다, 앨범은 넣다 끼우다 보관하다, 라는 동사를 필요로 한다.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를 갖지 않는 사물은 거의 없지 않을까. 간혹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거나 쓸수록 크기가 줄어드는 것들이 있다. ‘지우다’라는 목차에 유일하게 수록된 문구, 지우개가 그렇다.

이번 학기 첫 창작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제목을 주고는 짧은 글쓰기 시간을 주었다. 즉흥적인 글쓰기에선 대개 그렇듯 학생들은 연필이나 샤프펜슬로 글을 썼는데, 쓴 글보다 연필로 죽죽 지운 흔적이 더 많은 한 학생의 이런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우개를 가져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탄성 고무가 지우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으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지우개의 소재는 플라스틱 염화비닐이라고 한다. 환경호르몬으로 의심되는 물질이 들어있으나 고온에서 태우지 않는 이상 발생하지는 않으며 가공이 쉽고 유연성이 좋아서 아직 쓰이고 있다고. 지우개의 첨단 버전 격인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를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한 은행에서 타자기를 쓰던 비서라고 알고 있다.

쓰다, 지우다 같은 동사는 어떤 은유의 차원에서 그 뜻을 생각해 보고 싶기도 하다. 최근에 ‘주거해부도감’이라는 건축 책을 읽다가 한 채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원하는 모든 점들을 얻고 싶더라도 그것을 위해서 먼저 어떤 것을 ‘버리지(cut) 않으면 안 된다’라는 대목에서 무릎을 친 적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쓰고 싶은 것을 쓰되, 어떤 것을 컷 해야 하는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우는 일.

소설을 쓸 때 처음에는 연필로 쓰고 두 번째는 지우개로 쓴다고 말한 작가가 누구였나?

쓰고 싶은 이야기를 일단 끝까지 쓴다. 그 후 약간의 지우기가 필요하다. 틀린 글자를 지우고 지나친 기교와 과장을 지우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부분을 지우고. 더 이상 지울 게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것이 글쓰기에 관한 가장 훌륭한 퇴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어떤 글쓰기 책의 목차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문구점을 급습하라.’ 그러니까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종이와 연필과 지우개.
 
조경란 소설가
#지우개#문구왕#글쓰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