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은 창윤이네였다. 다른 집들은 죄다 한옥인데 창윤이네 집은 양옥인 데다 2층집이었다. 걔네 누나가 가끔 치던 ‘소녀의 기도’ 피아노 소리는 우리 동네에서 나는 유일한 악기 소리였다. 골목 끝 하숙집의 대학생 아저씨들이 부는 클라리넷 소리나 쌍둥이 자매 연옥 연희 누나네 집에서 가야금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뚱땅대거나 삑삑거리는 소리지 음악의 신이 하늘에서 만들어 인간에게 하사한 악기의 소리로 치지 않았다.
보통 아이들의 크레파스는 12색이나 16색이었는데, 창윤이 것은 24색이었다. 금색도 있었다. 늘 너무 시커메서 별로 쓸모도 없는 금색을 왜 넣어 놨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색깔 하나가 주는 부자의 느낌은 강렬했다.
부잣집은 수박 먹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났다. 보통 집들은 수박을 꼭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수박을 가르고 숟가락으로 수박을 떠서 물에 띄운 다음 설탕을 넣어 단물을 만들어 한 대접씩 퍼줬다. 창윤이네에 가면 방학생활 표지에 나온 것처럼 반달 모양으로 잘라서 줬다. 설탕물 맛이 아닌 진짜 제대로 된 수박 맛은 그 집에 가야 맛볼 수 있었다. 여느 집들은 수박 껍데기의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초록색 부분을 깎아내고 남은 하얀 속살을 노각처럼 무쳐먹었는데 창윤이네는 수박 껍데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가난한 자와 부자, 똘똘한 이와 멍청한 사람, 성공한 인물과 삶의 언저리에 붙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사랑스럽기만 한 이야기를 박완서 선생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만난다. 밉살스러운 사람을 밉다고 하니 그로써 용서의 시작이고 지지리 궁상인 사람을 시원하게 구박이라도 하니 연민이 도리어 그를 감싸게 한다.
‘다음 날부터 나는 서울서 사는 법도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실상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였다. 눈뜨자마자 뒷간이 어디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변소는 안집 식구들이 다 다녀나온 다음에 가는 거라고 했다. (중략) 똥마려운 것까지 안집한테 양보해야 된다는 건 그날 처음 알았다. 엄마는 한술 더 떠서 “너를 데려오면서 안집한테 얼마나 눈치가 보인 줄 아니? 방 얻을 때 두 식구라고 했거든. 주인집도 네 또래들이 있으니까 싫어할 것 같아서” 이러는 게 아닌가. 속일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있는 자식을 없는 척할 수가 있을까. 그 잘난 우리 엄마가?’
여덟 살짜리 계집아이의 세상 보는 눈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다. 싱아는 누가 다 먹어치웠는지 몰라도 박완서 선생님의 문학의 향기는 오늘도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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