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 소주 등을 구경 갔다 온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정작 나 자신은 14년 동안 상해 밖을 한 걸음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너무도 산천이 보고 싶던 차에 날마다 산과 바다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비할 데 없이 유쾌했다. 바다 위를 오가는 범선과 기선들, 푸른 소나무와 홍엽….”
김구가 ‘백범일지’에 적은 항저우(杭州) 시절의 회고다. 1930년대 전반, 일본의 감시망을 벗어나 김구가 피난처로 삼았던 집을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그의 아들이 다시 찾았다. 6·25전쟁 때 공군 지휘관으로 중국의 침공에 맞섰고 냉전 시기에 공군참모총장으로 예편한 이 노병은 방문 기념으로 ‘음수사원(飮水思源) 한중우의(韓中友誼)’라는 글귀를 남겼다. 1996년, 중국이 한국과 수교한 지 4년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이번에 항저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시진핑 중국 주석은 그 구절을 새삼 환기시켰다. 중국 국민이 김구를 보호한 이곳 항저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때 활동한 곳임을 강조하면서….
그 시절의 국내 신문에는 삼엄한 검열 속에서도 이와 관련한 임시정부의 소식이 보인다.
‘상해의 석간 영자지 이브닝 포스트는 통일적 조선○○당이 결성되었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이 보도는 독립운동에 통일된 단체가 없는 것이 운동의 약점이라고 하여 항주에서 대회를 열고 협의한 결과, 조선 중국 미국에 산재한 동지와 멤버로써 국제적으로 통일된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조직의 수령에는 김구가 선출되었다.’(동아일보 1936년 2월 1일자)
‘임시정부가 무정부상태’라고 할 정도로 사분오열되어 ‘임시정부 무용론’이 거론되던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여당 격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관한 소식이었다.
김구는 윤봉길의 거사 이후 상하이를 떠나 피신하는 동안 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와 면담하고 그 휘하의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개설하여 운영했다. 그러고 임시정부로 복귀하며 좌익계열에 맞서 국민당을 창당했다. 당명에서도 보듯 중국의 집권 국민당과 같은 한국국민당이었다.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것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 내전 중이었다. 일본과의 전쟁과 동시에 공산당의 게릴라전에 이중으로 휘말려 있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에 베푼 도움은 단순한 동정적 시혜라기보다 상부상조의 관계에서 발원한 우호적 성격이었다. 1933년 김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장제스는 김구에게 일본 군대의 인원과 활동에 관한 정보를 탐지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김구는 경비와 군사학교 설립 지원을 요청한 것이 그 한 예다. 마치 마오쩌둥이 초석을 놓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공산당 소속 빨치산 부대장 출신의 김일성이 한 해 전 창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필요에 의해서 지원해왔듯이.
그런 점에서 시 주석이 언급한 ‘음수사원’은 한중 우호의 미래를 위한 인사말로 한국 쪽에서 건네면 모를까, 중국 정상이 공식석상에서 국빈에게 엄숙한 표정으로 꺼낼 말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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