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 여행, 심연을 건너면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까

  • 여성동아
  • 입력 2016년 9월 12일 13시 46분


김연수가 염두에 두고 썼다는 통영은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온 도시가 우연의 조각들로 이어져 있어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라는 소설 속 문장이 절로 생각나는 통영시 중앙동 앞바다의 항구, 강구안.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라는 소설 속 문장이 절로 생각나는 통영시 중앙동 앞바다의 항구, 강구안.

20대 초반의 카밀라는 엄마 앤이 죽은 2년 뒤 아빠 에릭이 젊은 연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를 통해 그녀는 가족과의 연결 고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절감한다. 카밀라는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나 앤과 에릭에게 입양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걱정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에릭은 딸의 유년이 담긴 온갖 물건들을 한데 모아 카밀라에게 보낸다. 6개의 상자에 담긴 추억. 떠넘겨지듯 택배로 전해진 이 상자들을 함께 들여다보던 연인 유이치는 카밀라와 달리 오히려 흥분에 휩싸인다. 누군가의 인생이 6개의 상자에 담길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꺼낼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을 모으면, 썩 좋은 글감이 될 거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의 제안에 따라 물건 정리와 더불어 매일 최소한 3페이지씩 써 내려가는 작업에 집중한 덕분에 물건들에 담긴 추억과 이를 마주한 단상들은 저마다 붙여진 제목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갔고, 결국 한 권의 책으로 엮여 나오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책은 한 유명 출판사의 이목을 끌게 된다. 특히, 책 속의 여러 ‘단상’들 중 한 장의 사진에 유난한 관심을 보이는데, 그 사진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써줄 것을 주문해온다. 사진에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년경)’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고, 그 속엔 동백꽃 앞에 갓난아기를 안고 선 어느 젊은 한국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왜 카밀라인지에서 시작된 ‘나 찾기’는 사춘기 소녀 시절 매일같이 한국의 ‘진짜 집’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상상하다 좌절한 이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목적지는 자신이 태어났다고 입양기록부에 적혀 있는 한국의 남쪽에 자리한 어느 항구 도시인 진남이다.

진남에서의 생모 찾기는 진남여고에서 시작되었다. 이렇듯 구체적인 장소가 정해진 데는 카밀라가 17세이던 때, 친오빠라는 어떤 이가 보낸 편지에 카밀라의 생모는 진남여고에 재학 중이던 17세의 학생이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편지는 카밀라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훗날 죽음을 눈앞에 둔 앤의 고백으로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연인 유이치와 함께 진남여고를 찾아가 신혜숙 교장과 마주하지만 현모양처 양성이 최고의 덕목이고 열녀의 정신을 숭상하는 진남여고에서 미혼모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만 듣는다. 졸업 앨범을 샅샅이 뒤져봐도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은 없었다. 유일한 단서였던 진남여고에서의 생모 찾기는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잡을 요량으로 진남 지역의 신문에 생모를 찾고 있다는 사연을 싣는다. 여기까지 보면 여느 입양인들의 가족 찾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년의 여인 김미옥의 등장과 함께 반전이 시작된다. 중학교 때부터 생모와 친구였다는 그녀로 인해 카밀라는 25년 전의 충격적인 사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신혜숙 교장의 말은 온통 거짓이라는 것, 그리고 정지은이라는 생모의 이름, 무엇보다 카밀라를 낳은 이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이는 시작일 뿐, 이제 25년간 흩어진 채 남겨두었던 퍼즐 맞추기가 본격화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카밀라는 몰라야 한다는 듯 그 퍼즐들은 신혜숙 교장이 경고한 ‘감당하기 힘든’ 진실들을 저마다 감춘 채 흩어져 있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작가 김연수가 2011년 여름부터 1년간 계간 ‘자음과모음’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원래 연재 당시의 제목은 ‘희재’였는데, 이는 카밀라의 생모 정지은이 훗날 태어날 아이를 위해 지어둔 이름이자 또 다른 중요한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카밀라의 한국명은 정희재가 되는 셈이다.

희망은 심연을 건너가는 것

미륵도 달아공원에서 바라본 해넘이 풍경.
미륵도 달아공원에서 바라본 해넘이 풍경.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한 입양인의 생모 찾기에서 시작하고 있지만, 생모, 그리고 입양인 카밀라 자신의 정체에 다가갈수록 놀랍고도 의외로운 사실 혹은 진실들을 드러내며 점점 더 복잡한 얼개를 이루어간다. 마치 온 도시가 생모와 카밀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 카밀라가 진남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숱한 우연의 점들처럼 흩어져 있지만 결국 그 점들은 이어지며 선을 이루어 형체를 완성해가는 식으로 그녀와 관계된다.

여기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증폭된다. 애잔하고 잔잔할 듯했던 생모 찾기 이야기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면 그 앞에 또 다른 수수께끼가 가로막는 식으로 카밀라와 독자들의 혼란을 키우지만, 결코 번잡스럽지 않고 탄탄한 이야기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저마다의 사실들은 독자적인 힘을 갖고 소설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품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시점이 2인칭으로, 죽은 생모인 정지은이 딸에게 과거와 현재를 중계하듯 들려주는 문체로 바뀌지만 낯설지 않고 오히려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해져 몰입도를 높인다.

뿐만 아니라 소설이 전개되어갈수록 새로운 인물들이 카밀라와 생모 정지은과의 관계를 드러내며 속속 등장하는데, 정지은이라는 인물과 연결의 끈을 유지하고 있지만 카밀라의 생부가 누구인지, 왜 정지은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지 그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한 요소나 진실의 실마리 정도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뚜렷한 비중으로 이야기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편히 읽히는 글을 쓰면서도 결코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게 하는 작가의 힘이다. 그래서 소설은 크게 봐서 카밀라의 생부와 진실 찾기로 흐르고 있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진남의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 하나의 작은 소설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한 편의 장편 소설 속에 여러 편의 단편들이 얽힌 듯 포만감이 들게 한다.

치밀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진실의 열쇠가 자물쇠와 맞는지 아닌지를 추적해가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암시와 복선도 탁월하다. 아직 한국어가 서툰 카밀라를 위해 양부의 친구인 서 교수가 신혜숙 교장 사이의 대화를 통역해주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신혜숙은 영어 교사여서 통역이 전혀 필요 없는 인물이며, 그 분명한 거리감의 실체가 밝혀질 때 감탄이 절로 터져나오는 식이다. 더 이상 소설의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불가한 것은 이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을 아직 읽지 않은 이에게는 큰 결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 어디에도 ‘내가 너의 아빠다’라는 식으로 카밀라의 생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음은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그가 너의 생부다’라는 식의 숱한 오해들만 이어진다. 작가 김연수는 후기를 통해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이라고 맺으며, 그 진실 찾기의 방법으로 인물들 사이의 심연을 건너가보기를 권하며 마지막 실마리를 던지고 있다.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는 카밀라가 태어나고 생모 정지은의 마지막 이야기들이 담긴, 공간으로 남해안의 항구 도시 진남시가 나온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진남시에 대한 여러 묘사는 통영을 절로 떠올리게 한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여러 인터뷰에서 작가 김연수는 통영을 염두에 두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만 자칫 이 도시에 부정적인 인식을 줄지 몰라 가상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지만 그건 오히려 우리의 문학 여행을 부추기는 즐거운 효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는 도시

(왼쪽부터)예쁜 벽화가 관광객을 맞는 ‘동쪽 절벽 마을’ 동피랑,  강구안에 정박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통영의 대표 전통 시장, 중앙시장.
(왼쪽부터)예쁜 벽화가 관광객을 맞는 ‘동쪽 절벽 마을’ 동피랑, 강구안에 정박되어 있는 거북선 모형,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통영의 대표 전통 시장, 중앙시장.

카밀라의 여정을 따라가는 통영 여행은 소설 속 진남의 여러 공간 가운데 실제 통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오히려 너무나 정확히 일치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 첫 목적지는 통영시 중앙동 앞바다의 항구, 강구안이라 불리는 곳이다. 김에 맨밥을 싸 오징어 무침을 곁들이는 독특한 김밥(충무김밥)이며 거북선이 정박되어 있는 항구의 풍경이 묘사될 때 미소가 절로 지어졌던 것은 이 강구안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바다는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기에 항구는 안온하기 그지없다. 소설 속 묘사처럼 거북선 모형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항구를 따라 인기 먹거리인 충무김밥 집들이 즐비하다. 맑은 날이면 파란 하늘이 고스란히 반사되는 바다와 완만한 언덕을 따라 뻗어 올라간 도시의 풍경이 그야말로 그림 같은 곳이다. 그 강구안과 바로 맞닿은 중앙시장은 서호시장과 더불어 통영의 대표 전통 시장이자 소설에서 그 이름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이 강구안의 오른편으로 통영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된 동피랑이 있다. ‘동쪽 절벽(혹은 언덕)의 마을’이란 뜻의 이 마을에 오르면 강구안을 중심으로 한 통영 일대가 안길 듯 한눈에 들어온다. 동피랑이 유명해진 건 아무래도 평범했던 바닷가 언덕 동네에 더해진 벽화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며 통영의 상징, 혹은 동화의 한 장면이나 다양한 추상을 멋스럽게 그린 골목은 그 자체로 훌륭한 걷기 길이 되었고 좋은 포토 존이 되었다. 조악한 듯 소박했던 길이 관광객들의 발길로 조용할 날이 없어졌지만, 젊은 여행자들도 통영을 기꺼이 찾게 한 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통영은 평소에도 문학 여행지로 인기 있다. 박경리, 유치환, 유치진, 김상옥, 김춘수, 전혁림 등 통영에서 나고 살았던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면면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작곡가 윤이상 역시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 와중과 그 직후 영혼의 쉼을 위해 잦아든 많은 거장들의 이야기도 이 도시에 담겨 있다. 화가 이중섭은 전쟁 중 통영에 피란 온 뒤 정착하다 걸작 ‘황소’를 남겼다. 통영의 언덕배기 마을을 천천히 거닐다 저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와 도시의 풍경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들의 예술적 감수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들의 흔적을 만나는 명소들로는 강구안이 지그시 바라다보이는 남망산의 조각공원과,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청마 문학관, 그리고 그의 삶과 사랑을 상징하는 시 ‘행복’에 등장했던 중앙동 우체국 일대 200m 거리를 따라 조성된 ‘청마 거리’ 등을 손꼽을 만하다. 아내가 있는 몸이었지만 시조 시인 이영도를 향해 20년간 구애의 편지를 보낸 그의 이야기가 이곳에 스며 있다. 우체국 창문 앞에서 편지를 쓰던 시인을 두고 세상의 평가는 미완으로 남겨져 있듯 그들 사이를 오간 5천여 통의 편지도 이 거리의 전설로 남은 듯하다.

통영이 아닌 진남의 밤 앞에 선 시간
소설 속에서 정지은의 생부로 25년간 의심을 받아온 최성식이 카밀라를 데리고 간 곳이자, 통영에 살고 있는 청년 지훈이 충격에 빠진 카밀라를 달래기 위해 들렀던 곳은 통영 시가를 벗어나 충무교나 통영대교를 건너 이어진 미륵도의 달아공원인 듯하다. 미륵도를 크게 감싸는 매력적인 드라이브 길인 산양일주도로에 자리한 이곳에서 통영 최고이자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해넘이를 볼 수 있다. 붉은 기운을 서서히 펼치며 하루를 마감하는 해가 저 먼 수평선과 바다 사이로 몸을 숨기는 광경이야 여느 해넘이와 다를 바 없지만, 이곳은 먼 다도해의 풍경이 있어 더욱 극적이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이 항구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왔던 길을 바삐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통영을 들를 때마다 언제나처럼 반복했던 일인 통영의 야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통영대교가 생기기 전까지 미륵도를 오가던 다리로는 유일했던 충무교 아래에 이르면 그 아름답다는 통영 운하의 야경을 가장 가까이서 만끽할 수 있다. 배가 지날 때마다 밀려든 파도는 발치에서 찰박대고, 밤바다에 반사된 불빛은 파문에 떠밀려 덩달아 일렁이며 몽환적으로 흩어진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던 이 통영의 밤 풍경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어딘지 서늘한 기운이 감돎을 느꼈던 듯하다. 혹시 이 검은 바닷속으로 카밀라의 생모 정지은이 품고 침잠했던 진실과, 25년이 지나 그 물속에서 생모의 환영을 마주한 카밀라의 진남 여행이 중첩되어서는 아니었을까? 너무 앞서가나 싶으면서도 만약 이 작품을 읽고 이 자리에 선 누군가라면 공감할 듯도 하다. 오히려 배에 올라 이 도시의 밤 풍경을 바다에서 바라봤던 정지은과 카밀라의 시선이 이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반가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선사하는, 익숙했던 도시와 바다를 새롭게 만나는 즐거움이다.

Travel Information
1 통영 찾아가기(서울 기준)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대전까지 간 다음 통영~대전 간 고속도로(통영 방향)를 타고 북통영 IC나 통영 IC로 나와 곧장 도심으로 들어선다. 대중교통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나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하며, 소요 시간은 4시간 15분 정도이다.
2 통영 여행 정보 포털 사이트 : www.utour.go.kr

기획 여성동아
사진 남기환
디자인 박경옥

editor 남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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