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놓고 나면 모래를 씹으며 사는 것 같아요. 저도 약하고 여린 인간이고 내면은 많이 흔들리죠. 다만 (영화의) 리더로서 티내지 않으려는 거죠.”
영화 ‘밀정’으로 6년 만에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김지운 감독(52)은 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흥행에 대한 소감을 묻자 자기 고백부터 했다. 일제강점기 벌어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친일과 항일의 경계에 서있던 인물들을 다룬 ‘밀정’은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김 감독에게는 ‘장르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기존 장르로 규정짓기에 그의 영화는 꽤 독특하다. 1998년 데뷔작 ‘조용한 가족’은 ‘코믹 잔혹극’, ‘달콤한 인생’(2005년) ‘악마를 보았다’(2010년)는 ‘잔혹 누아르’,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년)은 ‘김치 웨스턴’으로 불리기도 했다.
‘밀정’ 역시 ‘콜드 누아르’라는 생소한 장르를 지향한다. “스파이를 다룬 영화인 만큼 차갑고 냉혹한 누아르로 만들려고 했죠. 그런데 누군가 빼앗아 간, 내 것을 다시 뺏는 자체가 원통한 일이죠. 제가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독립투사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울 수 있었을까, 그들의 가슴엔 감당 못할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고민하다 보니 영화가 뜨거워졌어요.(웃음) 다만 ‘신파’나 ‘국뽕’으로 흐르지 않도록 누르고 또 눌렀습니다.”
‘밀정’은 개봉 전에 베니스, 시체스, 토론토 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받으며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최근 폐막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선 ‘1온스의 군더더기도 없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들었다.
김 감독은 “‘장화, 홍련’이나 ‘달콤한 인생’만 해도 해외에서 먼저 장점을 발견해 줬다. 어떤 이들은 나를 ‘재평가의 아이콘’이라 했다”며 “특히 이번엔 영화 막바지, 폭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라벨의 ‘볼레로’를 썼는데 해외 평론가들이 그 음악을 쓴 수많은 영화 중 가장 아름답게 잘 쓴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고 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경계에 선 인물의 고뇌를 특유의 인간적인 연기로 그려낸 배우 송강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송강호와는 ‘조용한 가족’부터 벌써 네 번째 작품이다. “송강호라는 배우와 동시대에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차가움과 뜨거움, 모든 걸 다 갖고 있는 배우죠.”
그는 ‘악마를 보았다’ 이후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악의 본성을 계속 탐구하고, 그런 악마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잔인함이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상상하다 보니 우울증 약을 먹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어요. 결코 가벼운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2013년 할리우드로 건너가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라는 액션물을 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바꿀 작품이 필요했어요. 국내에선 처음으로 참담한 흥행 실패를 맛보긴 했죠. 그래도 배워 온 게 많아요. 그 전엔 참 집요한 사람이었는데 소모적이었죠. 이젠 그 집요함이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효율적인 집요함으로, 좀 합리적으로 바뀌었죠.”
김 감독은 차기작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실사판인 ‘인랑’을 선보일 계획이다. 미국에선 저예산 공포영화, 프랑스에서는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업도 마쳤을 정도로 폭넓은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좋아도 들뜨지 않고, 실패해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덤덤하게 생각하려고 해요. 당장의 흥행보다 세월을 뚫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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