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열구자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18일 03시 00분


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우리 음식 열구자탕(悅口子湯)과 일본 음식 ‘스기야키’. 비슷하지만 다르다.

조선후기 문신 서유문(1762∼1822)은 정조 22년(1798년) 겨울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간다. 가는 날이 장날. 이듬해 음력 1월 초, 건륭제가 죽었다. 느닷없이 조문사절단이 되었다. ‘무오연행록’ 1월 6일의 기록이다. “이날 오시(午時) 곡반(哭班)에서 물러나온 후 사슴 고기 세 근을 ‘황제가 내리는 것’이라 하고 주었다.”

상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소선(素膳)이다. 그런데 고기라니. 하인이 전하는 바깥 분위기는 더 기가 막힌다. “열구자탕을 놓고 화로에 둘러앉아 어지러이 먹고 있으며 술장수와 열구자탕 장수가 무수히 많습니다.” 상중에 고기 먹는 일을 꺼리지 않는 중국인들의 풍습이 놀라웠다.

1월 21일의 기록. “중국인들 밥 먹는 것을 보니, 밥은 작은 보시기에 고르게 담았고 무슨 고기 한 접시, 나물 한 접시요, 열구자탕을 받친 그릇이 없이 땅에 놓고”라고 했다. 우리의 열구자탕과 비슷한 것을 쉽게 열구자탕이라고 표기했다.

그보다 약 50년 전인 1748년 2월 조선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조명채(1700∼1764)는 한 달 뒤 이키시마(壹岐島·나가사키 현)에서 ‘스기야키’를 대접받는다. “영접관이 와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도주(島主)가 사신단에게 승기악(勝妓樂)을 보낼 터이니, 점심은 잠시 천천히 드십시오’ 하더라 한다. 승기악이라는 것은 저들의 가장 맛 좋은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윽고 사자가 왜인을 데려와 손수 만들어 바친다고 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이른바 열구자잡탕(悅口資雜湯)과 같은 것이며, 그 빛이 희고 탁하며 장맛이 몹시 달지만 그리 별미인지도 모르겠다.”(봉사일본시견문록)

비슷한 시기에 조선통신사 정사 조엄(1719∼1777)도 이키시마에서 ‘스기야키’를 먹는다. 1763년 11월 29일의 기록. “도주가 승기악을 바쳤다. 승기악이란 이른바 ‘삼자(杉煮)’인데 생선과 나물을 뒤섞어 끓인 것으로, 저들의 일미라 하여 승기악이라고 이름한 것이나, 그 맛이 어찌 감히 우리나라의 열구자탕을 당하겠는가?”(해사록)

문신 남유용(1698∼1773)의 기록에 따르면 ‘열구자’도 신선로와 마찬가지로 그릇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열구자는 작은 냄비의 이름이다. 고기, 어육 등을 넣고 푹 익힌다. 맛이 뛰어나고 맑으며 부드럽다. 예전부터 ‘열구(悅口)’라 했다”라고 했다(뇌연집). ‘열구’는 ‘입을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

이명환(1718∼1764) 역시 “납과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든다. 중간에 불을 굴처럼 길게 둔다. 여러 가지 어육, 채소 등을 그 사이(테두리)에 둔다. 푹 끓인 다음 모여서 즐겁게 먹는다. 열구자라 한다”(해악집)고 했다.

18세기 이후, 경남 남부 지역에는 일본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식 ‘스기야키’가 널리 퍼졌다. 19세기 초반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낙하생 이학규(1770∼1835)는 “승가기(勝歌妓)는 맛있는 고기 국물의 이름이다. 만드는 법은 대마도에서 왔다”(낙하생집)고 했다.

‘승가기(勝歌妓)’ ‘승기악(勝妓樂)’ 등은 일본 ‘스기야키’를 표현하기 위한 차음이다. 열구자, 열구자탕은 ‘고기+생선+채소’이나 일본 ‘스기야키’는 ‘생선+채소’다. 이학규는 ‘승가기’를 맛있는 ‘고기’ 국물이라고 했다. 열구자탕, ‘스기야키’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선로는 열구자탕과 ‘스기야키’ 등이 섞여 발전한 것이다. 열구자탕은 고종 39년(1902년)의 기록에도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 진연의궤). 열구자탕 대신 신선로를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음식’이라 하기는 힘들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열구자탕#스기야키#열구#승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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