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연간 커피 소비량은 1인당 428잔이다. 하루에 한 잔 이상 마실 정도로 커피에 빠졌다는 의미. 커피는 이미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인을 매료시키고 역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커피가 정착하기 시작한 17세기 이전 유럽 북부 1인당 맥주 소비량은 연간 300∼400L. 하지만 오늘날 독일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은 약 100L에 불과하다. 늘 약간 취해 살던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혁명적 사상도 키웠다. 커피를 두고 사회사 연구자들은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멋진 음료”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고 계몽주의의 불씨를 댕기게도 했다는 커피는 그렇다면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일까. 보존생물학자인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커피 입장에서는 몰려드는 900종 이상의 곤충이나 해충을 대처하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살충제 역할을 해주는 카페인의 함량을 늘리며 진화해 갔을 뿐이다. 이처럼 저자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커피를 포함한 과일, 작물의 씨앗이 사실 스스로를 위해 진화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과일을 먹을 때 주로 먹는 과육도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씨앗의 확산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알멘드로 나무는 씨앗 겉에 얇은 과육 층을 만들어 과일박쥐를 유인해 씨앗이 800m 이상 떨어진 곳으로 확산하게 한다. 맛있는 과육을 생산하고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작물을 돌보는 인간의 모습은 씨앗의 입장에서 이들을 위해 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책 제목대로 ‘씨앗의 승리’다. 하지만 저자는 이기적인 씨앗 이야기만 늘어놓지 않는다. “매번 ‘씨앗(seed)’을 내 쪽으로 들어 올리고는 ‘잘 살펴봐(Heed)’라고 소리쳤다”는 저자 아들의 말을 가슴에 새겨놓은 듯 13장에 걸쳐 씨앗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아들에게 전하듯 어렵지 않게 전한다.
이기적일지 모를 씨앗이지만 잘 활용하면 인간에게도 물론 유익하다. 냉전시기 살인의 수단으로 쓰여 충격을 줬던 아주까리 씨앗 속 ‘리신’은 세포 파괴 능력을 지닌 단백질로, 암세포만 선별적으로 사멸시킬 가능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숲속에서 자라는 자바 오이는 얇고 넓은 날개를 가진 씨앗의 모양이 스텔스 폭격기로 유명한 ‘B-2 스피릿’ 개발에 영감을 줬다. 2004년 쓰나미가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 연안 지역의 논을 덮쳤을 때 씨앗을 연구해온 씨앗은행은 염분에 내성을 가진 벼를 이곳에 제공해 심게 했다.
극작가, 사상가이자 평론가인 영국의 버나드 쇼(1856∼1950)는 씨앗의 위대함에 대해 특유의 익살스러운 평을 내렸다. “하나의 도토리 안에 집약되어 있는 강렬한 에너지를 생각해 보라! 땅에 도토리를 심으면 엄청나게 팽창해 거대한 참나무로 자란다! 양 한 마리를 땅에 묻어 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썩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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