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광이 들어오는 큰 창이 유난히 많아 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집. 장서 1만2000여 권이 빼곡한 서재에서는 매일 밤마다 ‘글로벌 인생학교’가 펼쳐진다. 이곳에 하룻밤을 묵으러 오는 여행객들은 주인장과 마주 앉아 대화한다.
경청과 환대가 가득한 정담(情談) 속에서 누군가는 삶의 용기를, 누군가는 영감(靈感)을 얻는 등 저마다 품은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최근 10년간 배낭여행객은 물론이고 영화감독과 건축가, 셰프, 화가, 음악인, 기업인 등 2만4000여 명이 다녀갔다. 방문객의 출신 국적도 80개 국가를 넘겼다.
경기 파주시 헤이리예술마을에 위치한 ‘모티프원’의 이야기다.
이곳 주인장은 헤이리예술마을 촌장인 이안수 씨(61). 최근 여행객들과의 대화를 담은 ‘여행자의 하룻밤’이라는 책을 펴낸 그를 만났다.
잡지 기자 출신인 그는 미국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교육을 공부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죽음은 하나의 삶을 숭고하게 완결 짓는 과정이란 걸 깨달았죠. 당시 남은 삶도 그대로 산다면, 유한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순간에 ‘해보지 않은 것’, ‘도전하지 않은 것’, ‘베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엄청난 후회가 밀려 올 것 같았어요.”
귀국 직후 이른 은퇴를 결심했다. 평소 탐독(耽讀)과 여행을 즐긴 그는 각국 여행자와 예술가가 모이는 ‘아지트’를 만들고 싶었다. 가장으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아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동기(motif)와 숫자 1(one)의 합성어로 ‘살아가게 하는 최고의 동기’를 찾자는 뜻에서 이곳 이름을 모티프원이라 짓고 2006년 첫 여행객을 받았다.
“독서가 저자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탐험하면서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면, 여행은 서재 바깥에서 하는 독서죠. 하지만 제가 물리적인 장소를 옮기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 사람들의 생각을 탐험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여행이 될 것으로 봤어요. 저와 여행객이 만나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처음 본 여행객들은 이 씨와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은 만큼 마음의 빗장도 쉽게 푼다. 결혼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삶과 죽음 등 철학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대화를 청해 자신의 방에 가기까지 4시간에 이른 여행객도 있었다.
일본 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나카무라 가즈미, 중국 예술계의 거두인 판디안, 포슬린 페인팅의 권위자인 독일의 한스 바워, 홍콩 건축가 게리 창,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박찬욱 김기덕 영화감독, 최일도 목사 등도 이곳에 다녀가면서 사업이나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주인도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만났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한 권의 책이죠. 여기 오는 분들을 ‘휴먼 북’으로 칭하고 싶어요. 종이책이 정제된 이야기를 담았다면 휴먼북은 원전(原典)과 같죠. 2만4000여 권의 휴먼북을 읽은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서가에는 휴먼북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이곳을 찾은 부모가 아이와 조립한 장난감부터 각국 기념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곳이 론리플래닛 등 외국 책자에 소개된 뒤부터 해외 여행객들은 작은 선물을 사갖고 온다고 한다.
예약은 물론이고 청소, 시설 유지·보수, 회계 등을 도맡는 그는 반농담으로 스스로를 ‘무수리’라 칭하며 “이른 은퇴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무를 사다가 서가를 직접 제작하고 때에 따라 사진 촬영 등의 작업도 병행한다.
이 씨는 “근육을 움직이며 일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삶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우주 질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그의 꿈은 더 많은 휴먼북 읽기. “모든 사람들은 행복의 씨앗을 품고 있어요. 이들에게 행복의 길을 인도하고 저 또한 행복을 배우고 싶어요.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양조(brewing)해서 행복의 향기를 퍼뜨리는 것이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