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국 생활이 ‘유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됐다. 삶을 마무리할 정착지를 오래 고민하던 중에 6·25전쟁 때 1년간 피란했던 제주와 인연이 닿아 이름 석 자 내건 미술관을 열게 됐다.”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원로 화가 김창열 씨(87)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김창열미술관’이 24일 제주 제주시 한림읍에 개관했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씨는 “물방울만 계속 그려온 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어서였다. 그래도 그 한 가지 노력을 멈추지 않은 덕에 이런 보답을 얻은 듯하다”라며 감격에 젖었다.
평남 맹산 출신의 작가는 1966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아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뒤 1969년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 남쪽 소도시 팔레조에 정착했다. 한 시골집 마구간을 작업실로 삼아 고된 시간을 보냈지만 그곳에서 그의 상징인 ‘물방울’ 작업이 움텄다. 1973년 첫 파리 개인전, 1976년 서울 개인전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부인 마르틴 질롱 씨도 이 마구간 작업실 시절 만났다. 질롱 씨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남편은 오로지 작품 생각만 하고 다른 건 도외시한다. 여리고 상처도 잘 받았다.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곧잘 찢어버려 늘 기분을 잘 맞춰줘야 했다. ‘그러려니’ 여기고 살다 보니 참 긴 세월이 흘렀다”고 말했다. “이번 개관전에서 1970년대 물방울 초기작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도 했다.
김 씨가 2013년 제주시에 기증한 작품 220여 점 중 23점을 선보이는 개관기념전 ‘존재의 흔적들’은 내년 1월 22일까지 열린다. 그의 작품세계 변화를 보여주는 시기별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기증 작품 선정과 개관전 기획에 참여한 유진상 계원예대 교수는 “워낙 귀중한 대표작 위주로 골라 가족들이 놀라워했다. 바다 건너로 작품을 이동시키는 과정과 수장고 시설이 염려스러웠는데 기대보다 잘 마련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김창열미술관이니 당연히 내 대표작을 내놓았다. 물론 이별할 때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제주의 자연은 프랑스와 비슷하다. 이곳 사람들도 프랑스인들처럼 미술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애정이 크다. 피란 시절에는 평소 존경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나는 듯한 감동을 안겨줬던 땅이다. 이중섭 등 다른 작가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도 새삼 다시 떠오른다.”
7월 공모를 거쳐 개막 하루 전인 23일 취임한 김선희 관장은 “아기자기한 지역 행사를 지속적으로 마련하면서 우수한 역량의 젊은 작가들을 풍성하게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입장료는 700∼1000원. 개관 기념으로 3개월 동안 무료로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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