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200여 년 동안 실천된 적이 없는 조선 사족(士族)의 ‘자기조정 프로그램’이다.”
23일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린 ‘실학 담론의 출발과 심화, 실학의 새로운 모색’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실학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24일까지 한국실학학회가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으로 알려진 실학의 연구 쟁점을 논의했다.
강 교수는 발표 논문 ‘경화세족과 실학’에서 실학이 권력의 핵심에서 비켜난 지식인들의 양심적 개혁론이라는 통념을 부정했다. 유형원 정약용 박지원 등 상당수 실학자들은 당시 집권 주류 중 하나이자 한양 일대의 엘리트 사족인 경화세족(京華世族)에 속했다는 것. 이들이 주장한 실학은 백성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형식적으로 내놓은 ‘셀프 개혁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유형원이 1670년 ‘반계수록’을 완성한 뒤 1858년 최성환이 ‘고문비략’을 저술하기까지 약 200년 동안 적지 않은 개혁안이 등장했지만 제대로 실천되지 않은 채 사족체제가 유지됐다. 반면 민란 등을 통해 분출된 ‘노비의 양인화’ ‘양반 군역 분담’ 등 파격적인 백성의 요구는 사족에 의해 번번이 제거됐다. 강 교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 난으로 민중이 사족에 대항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청(淸), 일본은 에도 막부가 정권 교체 후 사회를 일신하며 번영기를 구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강 교수는 사족의 ‘셀프 개혁안’ 위에 1930년대부터 자연, 기술, 문학, 예술에 대한 실학자 등의 접근이 덧씌워져 ‘근대사상의 맹아(萌芽)로서의 실학’이라고 과대 포장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족의 개혁안을 ‘실학’이라 할 수 없고 ‘유교적 경세(經世)학’ 정도로 접근하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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