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중구에서 열린 한국여성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박영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로 불린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1759∼1824)의 ‘청규박물지’를 학술적으로 처음 조명했다.
박 교수는 이날 논문 ‘빙허각 이씨의 청규박물지 저술과 새로운 여성 지식인의 탄생’을 발표했다. 2004년 발견된 유일본인 일본 도쿄(東京)대 오구라(小倉)문고 소장 필사본을 분석한 것. 박 교수는 빙허각 이씨의 청규박물지 저술로 당시 여성들이 남성의 전유물이던 지식을 단순 공유한 수준을 넘어 지식 생산의 주체로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성 살림·실용지식 기술(1∼2권)에서 남성의 전유물이던 천문, 지리, 격물 등의 영역(3∼4권)으로 확대된 점 △한자를 못 읽던 여성을 배려해 한글로 기술된 지식서라는 점 △기존 지식 소개에 그치지 않고 ‘신증(新增·새로 찾아냄)’이 더해진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청규박물지’가 저술된 후 여러 버전으로 필사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박 교수는 필사본 속 최초 작성된 서문(序文), 시동생인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빙허각 이씨가 사망한 1824년에 작성한 묘지명에서 언급한 청규박물지, 황해도에서 발견된 달성 서씨가(家) 소장본 설명 내용(본보 1939년 1월 31일자 보도) 등을 비교했다. 그 결과 책의 내용은 유사하지만 권수 구성 등이 2∼5권으로 다르다는 점을 밝혔다. 4권으로 구성된 오구라문고 소장본에는 3권을 1권으로 순서를 바꾸려던 흔적과 독자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독후기도 있다. 남성으로 보이는 한 독자는 각종 지식이 한글로 기술돼 여성들에게도 널리 읽힐 것을 우려하는 내용을 남겼다. 박 교수는 “청규박물지가 수차례 필사돼 읽혔고 이를 보는 독자의 태도도 다양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809년 빙허각 이씨에 의해 쓰인 것으로 알려진 ‘청규박물지’는 1939년 황해도에서 처음 실물이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쳐 사라졌다가 2004년 도쿄대에서 필사본이 발견됐다. 하지만 1939년 발견 후 빙허각 이씨가 저술했던 실생활 지식을 담은 ‘규합총서(閨閤叢書)’와 함께 단순 기록수집서로 취급돼 2004년 재발견 뒤에도 최근까지 연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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