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처음 마셔 본 게 언제였는지? 중학교 때 원예반 선생님은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자 이따금 카페에 데리고 가셨다. ‘뜨락’이라는 데였는데 선생님 댁과 우리들의 집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고, 알고 보니 우리 동네였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열일곱 살 때 그 카페에서 커피를 처음 마셔 본 것 같다. 크고 흰 잔, 그 안에 담겨 있던 까만 액체. 그 알 수 없는 맛…. 그 후 혼자 뜨락에 들락거리면서 나는 어른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8년 전에 처음으로 작업실을 얻었을 때 책장과 책상 말고도 필요한 물건이 너무나 많다는 데 깜짝 놀랐다. 공간이 좁기도 했지만 작업실이 수도사의 방처럼 보이길 원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사물들만 들여놓기로 했다. 그렇게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커피를 마시기 위한, 주전자 핸드밀 서버 같은 핸드드립 도구들.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볶은 원두를 사다 먹는 것으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커피 양이 늘어버렸다. 이때다 싶어 로스팅에 관한 책들을 쌓아 놓고 독학을 시작했다.
생두를 볶으면 커피콩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콩 내부에 생긴 벌집과 같은 구조를 현미경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명 ‘허니콤 구조’. 그 안에 커피의 맛을 좌우한다는 클로로제닉산, 카페인, 단백질 등의 성분이 부착된다. 일본의 한 공학도가 쓴 ‘더 알고 싶은 커피학’에서는 그 때문에 로스팅과 분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의 첫 번째 커피 분쇄기는 실용적인 ‘칼리타’ KH3. 그 후 일 년에 한두 번 사치를 부리기도 하는데 클래식한 핸드밀을 구입할 때다. 보통은 위가 열려 있고 커피 가루가 담기는 서랍이 큰 제품을 사용하지만.
일주일에 세 번쯤 소형 로스터로 커피를 볶는다. 핸드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는 갓 볶은 원두를 슬그머니 들고 나가기도 한다. 그런 즐거움이 없다면 일을 마친 후 자정 넘어 문을 활짝 열어둔 작업실에서 커피를 볶는 맛이 덜하겠지. 책상 앞에 앉기 전에 ‘예가체프’를 천천히 간다. 커피 향이 퍼지면 마음은 누그러져 버리면서 뭐 이 정도도 괜찮잖아? 싶어진다. 삶의 바닥에는 수많은 단층선이 있고 그것들 중 언제 하나가 일상을 뒤흔들게 될 지 알 수 없다. 맥주 한잔을 마시는 순간, 커피를 내리는 순간, 좋아하는 책 한 페이지 읽는 순간. 괜찮은 순간들이 모이면 정말 괜찮은 하루가 될지 모른다.
소복이 담긴 커피 가루에 물을 ‘내려놓는’ 느낌으로 주전자를 기울인다. 아래로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만들어진 맛. 아무도 없는데 오늘은 어째서인가 정성껏 두 잔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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