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더맨인더홀’ 이은율 성대결절로 성악가 꿈 접고 배우로 홍일점 역할…품격있는 연기에 매료
뮤지컬 ‘더맨인더홀(The Man in the Hole)’은 꽤 까칠한 작품이다. 어둡고 음울하지만 환상적이다. 국내 공연계의 ‘간달프’로 불리는 이현규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음악은 작곡가 민찬홍의 솜씨다.
연인인 하루와 연아는 한 밤중에 집 앞 놀이터에서 강도를 만나 잔인하게 칼에 찔린 채 맨홀 속에 버려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끔찍한 고통 속에서 눈을 뜬 하루는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되고, 급기야 이 작품의 주요한 캐릭터인 ‘늑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현규 작가는 “한 평범한 미생같은 남자에게 벌어진 비극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푼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글쎄다. 이렇게 간단히 한 줄로 표현될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은 작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밑바탕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이 묵직하게 깔려 있다.
이은율(38)은 ‘더맨인더홀’에서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연아를 맡았다. ‘황태자 루돌프’, ‘쌍화별곡’, ‘천국의 눈물’ 등 대극장 무대를 통해 익숙하지만 ‘달콤한 인생’, ‘페이스오프’, ‘루나틱’과 같은 소극장 작품에도 많이 출연했다.
하루와 늑대라는,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남자배역들 사이에서 이은율은 ‘연아’라는 청초한 꽃 한 송이를 아름답게 피웠다.
이은율은 원래 신학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소프라노였다. 대학 졸업 후 전문싱어팀에서 일하며 가요, 팝부터 뮤지컬,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섭렵했다.
“그러다가 덜컥 성대결절이 왔어요. 6개월 동안 노래를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하던 암울한 시기였죠.”
성악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이은율은 성대결절을 고치기 위해 독일로 날아갔다.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하던 중 우연히 뮤지컬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를 보았다. 뮤지컬이라면 싱어팀에서 이미 충분히 ‘맛’을 봤던 레퍼토리가 아닌가. 집을 싸 한국으로 돌아온 이은율은 무작정 ‘명성황후’ 오디션에 원서를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나갔다. 춤을 추라고 하는데 어쩔 줄을 몰라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단다. “그런데 덜컥 붙었어요”. 이은율이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이후 크로스오버 재즈밴드의 보컬리스트와 가수(개인 싱글을 두 번이나 냈다) 활동을 병행하며 차곡차곡 배우로서의 캐리어를 쌓았다.
춤치 이은율도 옛말이다. ‘황태자 루돌프’에서 보여 준 ‘전쟁 같은 탱고’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번 ‘더맨인더홀’에서도 이은율의 춤 실력을 살짝이나마 감상할 수 있다.
‘더맨인더홀’은 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은 작품이다. 창작물인데다 초연이다 보니 개막하고도 바뀌는 부분이 적지 않았단다. 이은율은 “가볍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극과 음악이 갖고 있는 서정적이면서 강렬한 색깔이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은율은 노래할 때와 대사를 칠 때의 목소리 톤이 완전히 다르다(이런 배우는 많지 않다). 실은 둘 다 매력적이다. 듣고 있으면, 끝없이 어두운 ‘구멍(홀)’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황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