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태양의 천사-허영숙·이광수 실록소설’이라는 책을 받았다. 그즈음 신문에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라는 평전의 서평도 실렸다. 우연이었다. 그렇지만 ‘이광수’라는 무게감 때문일까, 두 책을 모두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책을 펴자마자 나의 무심함을 책했다. 춘원 이광수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無情)’을 1917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게 꼭 100년이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던 재사(才士), 그를 빼놓고는 한국 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문호,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으로 아직도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문제적 인간, 6·25전쟁 때 납북돼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최후…. 춘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큰 산이다.
‘태양의 천사-허영숙·이광수 실록소설’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나남출판)이다. 춘원의 다면성 중 ‘사랑’에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다. 그런데 ‘허영숙’이라는 이름 자체도, 허영숙을 이광수 앞에 쓴 것도 왠지 낯설다. 허영숙은 춘원이 중매로 만난 첫 부인과 이혼하고 연애를 통해 재혼한 신여성이다. 그냥 신여성이 아니라 도쿄 여의전을 졸업한 한국 최초의 여성 개업의였고, 22세 때 춘원과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떠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이 소설을 쓴 김광휘 씨(74)를 만나봤다. 그는 MBC 라디오에서 ‘여성시대’ ‘격동 50년’을, MBC TV에서 ‘제4공화국’ ‘문학산책’ 등을 집필한, 그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방송작가다. 소설의 제목부터 물어봤다.
“작중에서 허영숙은 자신을 밀랍 날개를 단 천사로, 춘원을 태양으로 묘사한다. 상대방을 사랑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던 이카로스를 비웃는 자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일 것이다.”
그러니 ‘태양의 천사’는 곧 ‘춘원을 사랑한 허영숙’이라는 뜻이다. 소설도 허영숙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자는 이 소설을 ‘연애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허영숙의 러브스토리가 기둥이긴 하나 춘원이 워낙 거물인데다, 역사적 사실과 시계열에 따라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고, 동시대를 살아간 유명인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말고도 인간 군상과 엄혹했던 시대에 몰입하게 만든다. 춘원과 허영숙을 화자로 한 시대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 표지와 소설 첫 머리에 등장인물 61명의 이름을 싣고, 소설 말미에 허영숙의 연보를 덧붙인 것도 나의 그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그나저나 작가는 왜 춘원의 아내를 소설로 살려내고 싶었을까.
“2년 전쯤 미국에 살고 있는 춘원의 막내딸인 이정화 박사(81)가 한국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다. 이 박사가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숱하게 많은 글이 나왔지만, 어머니도 소설감이다.’ 그 말에 끌려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무렵, 이 박사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어머니는 소설의 주인공이 돼도 좋을 캐릭터다. 흥미로운 인생을 사셨다”고 했다. ‘흥미로운 인생’이란 무슨 뜻일까. 기자는 남편 춘원의 생활력과 경제관념 등에 대해서는 엄처(嚴妻)였지만, 문사(文士) 춘원에 대해서는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에 비유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양처(良妻)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작가는 춘원과 허영숙, 그리고 그 시대와 관련된 수십 권의 책을 구해 읽었다. 이 박사와는 주로 e메일을 통해 부모의 일화를 들었다. 그 결과가 이 소설이다. 그런데 ‘실록소설’은 또 뭔가.
“사실을 바탕으로 했지만 허구도 들어있다는 뜻이다. 사실과 허구가 7 대 3쯤 된다. 예를 들어 허영숙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의 환영 행사에서 화동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박에스더가 허영숙에게 의사가 되라고 권유했다는 것은 허구다.” 생각보다는 빨리 쓴 것 같다는 말에 그는 “방송작가의 장점은 자료를 잘 찾는다는 것과 빨리 쓴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김 씨는 춘원을 어떻게 평가할까. 너무 큰 질문이니 친일문제로 좁혀서 물어보자.
“춘원이 광복 전에 살았던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의 농가를 춘원문학관으로 만들고 싶다는 게 유족들의 꿈이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는 그마저도 힘들다. 전국에 숱하게 많은 작가들의 문학관이 있는데 춘원문학관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지….”
작가의 춘원에 대한 이런 호의는 춘원의 창씨개명과 학병권유 등 명백한 친일행위는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40여 명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한 ‘위장 친일’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하기에 이른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이긴 하지만.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라는 평전(푸른역사)의 저자는 하타노 세쓰코(波田野節子·66) 일본 니가타현립대 명예교수다. 이 책은 지난해 그가 일본에서 펴낸 ‘이광수-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을 번역한 것이다. 일본 교수가 쓴 최초의 이광수 평전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국내에서 나온 평전으로는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탁월한 저술이 있다(1981년 4월∼1985년 10월 문학사상 연재, 1986년 한길사 단행본, 1999년 솔출판사 개정증보판). 하타노 교수도 ‘김 교수의 책에 많은 신세를 졌다’고 밝혔다.
하타노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이 이광수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이라고 느끼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앎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가능한 한 손에 닿는 자료를 모으고, 사실에 정확성을 기하며 성의를 다하여 이 책을 썼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일본 교수가 한국 소설가에게 이만큼 ‘미쳤다’는 사실은 칭찬받을 일이지 꼬투리 잡을 일은 아니다.
마침 하타노 교수와 이정화 박사가 ‘제12회 춘원연구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하러 한국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 학술대회는 24일 서울 서초구 사임당로 한국어문회관에서 열렸다. 학술대회가 끝난 뒤 두 사람을 만나봤다.
우선 하타노 교수가 춘원에게 빠지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30년 전 ‘무정’을 읽은 게 계기였다.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수수께끼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이런 글을 썼을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고, 결국은 많은 논문과 책을 쓰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에게도 ‘슬며시’ 춘원의 친일 문제에 대해 물어봤다. “남의 나라 일에 대해, 그것도 원인을 제공한 나라 사람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내심으로는 아깝다.” ‘아깝다’는 말은 친일논쟁 때문에 춘원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학술대회가 끝난 뒤 춘원연구학회는 총회를 열었다. 8월에 한국문인협회가 춘원문학상과 육당문학상을 제정한다고 했다가 비판여론에 밀려 철회한 사실도 보고됐고, 한 출판사가 유족이나 학회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춘원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공표한 사실도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총회는 “춘원을 특정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값싸게 팔아넘겨서는 안 된다”며 출판사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이 박사는 모든 과정을 제일 앞줄에서 묵묵히 듣고 있었다.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회가 끝난 뒤 춘원문학상이 무산된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100년, 200년 뒤에까지 (작품이) 보존된다면 소원을 이룬 것이다. 상은 100년, 200년 뒤에 만들어도 된다. 그때까지는 연구가 계속될 것 아닌가.”
그는 전쟁 통인 1952년 이화여고생 시절,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덕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분자생화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정착했다. 이 박사는 “나는 과학자라서 문학은 잘 모른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기자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문학은 모를지 몰라도 아버지 춘원을 매우 사랑했던 딸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고집 부릴 생각은 없다는 뜻일 뿐, 어찌 100년, 200년을 기다려도 좋다는 것이겠는가. 그는 누구에게나 ‘참 곱게 나이를 먹었다’거나 ‘80세가 넘었는데도 꼭 소녀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의 대답은 부드러움에서 나온 결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본인은 의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겠지만.
기자는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지금도 한일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춘원에 대한 소설과 평전을 읽으며 색다른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는 한일문제를 ‘역사’라는 망원경으로만 접근해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춘원이라는 ‘인간’을 통해 현미경으로 본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거창한 수레바퀴가 한 인간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사례연구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그 ‘인간’은 꼭 춘원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친일’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발력이 강한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내가 읽은 소설과 평전을 쓴 작가와 교수, 그리고 춘원의 딸이 춘원에 대한 인식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무정’을 비롯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부정하기 어렵다. 마침 내년이 ‘무정’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무정’을 나침반 삼아 그의 공과를 냉철하게 따져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길 기대해 본다.
이광수는 자신의 호를 ‘고주(孤舟)’에서 ‘춘원(春園)’으로 바꾸었으나 여전히 홀로 배를 젓고, 봄은 아직도 먼 듯하다. 그래도 외로운 배에 누군가가 승선을 하려 하고, 외로운 봄동산도 누군가가 가꿔보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춘원 “동아일보에서 보낸 9년, 가장 바쁘고 보람”▼
동아일보와 이광수·허영숙 부부의 인연
소설 연재 인연… 기자-편집국장까지 소설 ‘이순신’ 현충사 모금운동 기여 부인도 조선 최초 신문사 부장 지내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일보 사옥 14층에는 편집국 회의실이 있다. 한쪽 벽면에 역대 편집국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평소엔 눈길을 준 적이 없다. 이번에 춘원의 기사를 쓰면서 1920년 창간 이후 초창기 편집국장들의 사진을 살펴봤다. 춘원도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1923년 5월부터 1933년 8월까지 근무했다(1924년 연초에 게재한 ‘민족적 경륜’으로 필화를 겪으며 1년 3개월간 사직했던 기간을 빼고도 재직기간이 9년이 된다).
춘원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922년 ‘개벽’에 게재한 ‘민족개조론’이라는 글 때문에 1년 정도 활동을 못하고 있을 시절이다. 이 글은 조선민족은 열등민족이기 때문에 개조가 필요하다는 취지여서 격렬한 비난을 받으며 춘원은 칩거에 들어갔다. 그런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사람이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처음에는 ‘가실(嘉實)’이라는 작품을 Y생(生)이라는 익명으로, ‘선도자’를 장백산인이라는 아호로 연재하도록 했고, 나중에 정식기자로 채용해 편집국장까지 맡겼다. 춘원이 회고했듯 그는 동아일보에서 가장 바쁘고 보람 있는 기간을 보냈다. 소설만 13편(재생, 춘향전,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등)을 썼고, 사설,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집필했다. 하루 평균 70장의 원고지를 써냈다는 기록도 있다.
1931년 6월 26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순신’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보다 한 달 앞선 5월 13일 동아일보는 충남 아산군에 있는 충무공 묘소의 위토(제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가 후손들이 진 빚 2400원 때문에 경매에 넘어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윤치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충무공유적보존회’를 만들고 사설과 기사를 써가며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였다. 소설 ‘이순신’은 모금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결국 2만여 명으로부터 1만7000원을 모아 빚도 갚고, 위토도 추가로 매입했다. 김동인은 1935년 잡지 ‘삼천리’에 쓴 ‘춘원연구’에서 “춘원은 쓰고 또 썼다.…가장 세력 있는 신문 지상에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려졌다”고 했다.
부인 허영숙도 1925년 12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동아일보에서 조선 최초의 신문사 여성부장(학예부장)으로 근무했다. 그를 도운 차장은 ‘불놀이’라는 한국 최초의 자유시를 쓴 주요한이었다(주요한도 나중에 학예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이 된다). 허영숙을 학예부장으로 발탁한 것은 병치레가 심해 결근이 잦았던 춘원의 원고수발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가 썼던 ‘화류병자의 혼인을 금할 일’(1920년 5월 10일자)이라는 글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도 계기가 됐다. 그는 재직 중 의사와 여성이라는 전문성을 살려 ‘가정 위생’ ‘부인문제의 일면, 남자할 일 여자할 일’ 등의 기사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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