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북카페]‘햄릿의 고뇌’에 휩싸인 태아와 충격 반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3일 03시 00분


英작가 이언 매큐언의 ‘호두 껍데기’

  ‘속죄’ ‘체실 비치에서’ ‘칠드런 액트’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국민 작가’ 이언 매큐언(68)이 2년 만에 ‘호두 껍데기’(사진)로 독자들을 찾았다.

 신작 소설의 화자는 놀랍게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배 속의 태아이다. 약 8개월에 접어든 태아는 어머니의 탯줄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자신이 듣고(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아직 볼 수는 없지만) 느끼는 정보를 종합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추리하는 영민한 모습을 뽐낸다.

 그는 어머니가 자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팟캐스트를 통해 타국의 정치인을 평가하고 주정뱅이 어머니가 종종 마시는 와인을 탯줄을 통해 맛보며 ‘한 잔 더 할 거라면 상세르(포도 품종)보다는 샤토 엘시노어가 낫겠어’라고 중얼거린다.

 2개월 후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태아에게 생존에 대한 고뇌를 안겨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머니가 삼촌(아버지의 남동생)과 불륜을 저지르며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모의를 듣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시인으로, 런던 북부의 700만 파운드(약 100억 원)에 달하는 저택을 상속받는다. 임신 직후 별거를 시작한 어머니는 시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부동산 개발업자로 일하는 시동생은 형이 물려받은 저택을 욕심내 형수와 공모해 형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이쯤 되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줄거리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어머니인 트루디(흔히 ‘거트루드’라는 이름의 약칭으로 쓰인다. 햄릿의 어머니 이름이다)와 삼촌 클로드(햄릿의 삼촌은 클로디어스)가 공모해 아버지에게 독이 든 스무디(‘햄릿’에 나온 독주)를 건네고, 삼촌과 어머니는 저택을 차지한다.

 혹시나 이를 눈치 채지 못했을 독자를 배려해 매큐언은 ‘햄릿’의 한 구절로 소설을 시작한다. ‘오, 하느님. 나는 우주의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도 스스로 무한한 우주의 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자궁(호두 껍데기)에 갇힌 태아가 햄릿이라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이 책에서는 ‘태어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태아의 운명은, 그리고 그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매큐언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충격적인 반전은 이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지난달 1일 출간된 이 작품은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매큐언이 대중적으로 얼마나 사랑받는 작가인지를 보여줬다. 특히 그에게 호의적인 가디언지는 이례적으로 세 번에 걸쳐 이 책의 리뷰를 다뤘다. 문단과 언론은 ‘고전 비극을 현대적이고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며 대체로 칭찬하는 분위기다.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는 ‘유려한 글 솜씨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명작’ ‘기발한 상상력’이라는 호평과 ‘자극적인 소재에만 치중’ ‘가식적인 주제’라는 비판으로 나뉘어 흥미롭다.
 
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
#이언 매큐언#호두 껍데기#햄릿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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