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 주역 가수 헤르만 빙켈만의 집 문을 누군가가 세차게 두드렸습니다. “문 열어.” “누구십니까?” “나, 국립오페라 감독이다. 문 열어.”
문을 연 빙켈만의 눈앞에는 작곡가 후고 볼프(사진)가 있었습니다. “감독으로서 명하니, 내 앞에서 노래하시오.” 빙켈만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빈 국립오페라 감독은 후고 볼프가 아니라 구스타프 말러였기 때문입니다. 횡설수설하는 볼프를 결국 사람들이 정신병원으로 데려갔고, 그는 이듬해 병원에서 43세의 길지 않은 삶을 마쳤습니다.
볼프는 왜 자신이 빈 국립오페라극장 감독이라고 착각했을까요? 당시 앓고 있었던 매독의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에 빠진 것이 직접적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빈 국립오페라 감독이었을까요? 그 직위는 볼프가 평생 가고 싶었던 ‘꿈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그 꿈은 실제 이뤄질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감독이었던 말러는 볼프와 재능을 다투던 빈 국립음대 동급생이었기 때문이죠. 두 사람은 1860년생으로 나이도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까칠한 볼프의 성격이 늘 화를 불렀습니다. 교장과 충돌한 끝에 빈 국립음대를 그만두었고, 음악 저널을 통해 당대 빈의 존경을 받고 있던 브람스를 공격한 결과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뫼리케, 아이헨도르프 등의 명시에서 영감을 받아 ‘외로운 늑대’처럼 고독하게 작곡을 이어갔지만 최후의 순간 그에게 친구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동급생이었던 말러가 오스트리아 제국 음악계 최고 지위인 국립오페라극장 감독에 오르자 볼프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이후 불운하게 삶을 마쳤지만, 시의 맥락에 최대한 다가가 절묘한 음악적 표현을 이끌어내는 볼프의 가곡들은 오늘날 살아남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소프라노 임선혜와 테너 시모 메키넨, 앙상블 오푸스가 볼프의 ‘이탈리아 가곡집’을 무대에 올립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랄프 고토니가 반주부를 실내악단용으로 편곡한 악보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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