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헌(風憲) 이 씨가 산속을 가는데 도적 둘이 돈꿰미를 메고 가고 있었다. 풍헌이 물었다. “어디로들 가시오?” “우리는 상인이오.” “무엇을 파시오?” “담배요.” “다 팔았소?” “아직 못 팔았소.” “근데 어째 담배가 아니라 돈을 지고 있소?” 도적이 대답을 못 하였다. 자꾸 따라가며 캐묻자 도적이 칼을 뽑았다. “이놈, 죽고 싶으냐? 어찌 말이 많으냐?” 풍헌이 웃으며 말하였다. “햇병아리로구나.” “무슨 소리냐?” “눈이 있으면서 장사(壯士)도 못 알아보느냐? 우리가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다. 목숨 걸고 함께 일하자.” 도적이 의심하자 풍헌이 말하였다. “오늘날 백성 치고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단지 떨치고 일어나지 못할 뿐이다(今之民孰無是心? 特未奮耳). 생각해 보라. 호랑이나 이리를 피하듯 도적을 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희들이 도적인 줄을 알고서도 기꺼이 화를 자초하겠는가.” 도적이 수긍하자 풍헌이 말하였다. “의형제가 될 것을 맹세하자.”
조선 말기의 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 선생의 ‘이풍헌전(李風憲傳)’입니다. 풍헌은 조선 시대 면(面)이나 리(里)에서 작은 직임을 맡았던 사람인데, 하도 세상에 도둑이 넘치니 너도나도 도둑이 되려고 나서나 봅니다.
주막에 이르러 큰 사발 세 개에 술을 따라 일제히 마셨다. 술이 비워질 때쯤, 도적의 목은 뒤로 젖혀지고 눈은 사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 풍헌이 방망이로 두 도적의 목젖을 냅다 쳤다. 그는 쓰러진 도적들을 묶어서 현(縣)으로 끌고 갔다.
현의 관리는 도적의 돈이 탐이 났다. 게다가 저놈들을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으면 공도 빼앗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이 풍헌이 양민을 죽이려 했다고 떠들어댔다. 도적들도 눈치를 채고는 몇 차례 심문을 해도 죄를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풍헌이 화가 나서 쇠몽둥이를 들고 그들 앞에 서서 말하였다. “자복하지 않으면 뼈를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도적들은 그제야 탄식하며 자복하고 벌을 받았다. 이때부터 이 풍헌의 명성은 자자해졌고, 일대에 숨어 있던 강도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고 한다.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 도적은 처벌했다지만, 저 농간을 부리려던 관리는 또 어찌해야 할지….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여 입맛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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