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택시를 탔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환했고 서울의 야경을 수놓은 불빛들이 꽤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저 불빛 하나마다 야근 중인 직원 하나가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와 우리 회사가 그렇듯 저 불빛 아래에서는 무엇인가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일 테고, 그들도 나와 같이 정해진 기한을 맞추기 위하여 불빛을 환하게 켜고 일주일에 사나흘씩 야근을 하고 있으리라. 예쁜 밤 풍경에 감탄하고픈 생각이 들다가도, 저 풍경을 만들기 위하여 밤늦게까지 앉아 있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불빛이 마냥 아름답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하니 택배기사님이 아파트 현관 앞에서 박스를 내려놓고 계셨다. 자정까지는 10여 분이 남아 있었다.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왔는데 여기에도 있구나 싶었다. 이렇게 늦게까지도 배송을 하시냐고 묻자 “오늘 할당된 건 다 끝내야 해서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아 마음이 바쁘네요”라는 고된 대답이 돌아왔다. 일부러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러 기사님을 기다렸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저도 이제 퇴근해서 남일 같지가 않네요. 고생 많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며 왠지 모를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피로에 찌든 몸을 깨우고자 늘 가던 단골 카페를 들렀다. 그런데 어제까지 멀쩡히 장사를 하던 가게가 공사 중이 아닌가. 작업하는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이제 여기는 치킨집으로 바뀔 예정이란다. 회사 바로 아래에 위치해 단골도 많았고 썩 장사가 잘돼 보이는 카페였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영 아쉽고 또 좀 의아했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두텁던 주인아저씨의 카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정을 여쭈어 보았더니 팍팍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원래 주인아저씨는 건축사무소에서 설계 일을 하는 직원이었다. 업무 특성상 밤샘도 많고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큰마음을 먹고 카페를 열었고, 자기 사업을 해보니 애착도 남달라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도 힘든 줄 몰랐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온전히 자기만의 사업을 하다 보니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할 때보다 세세하게 신경 쓸 일이 훨씬 더 많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점점 오르는 월세에 아르바이트생 월급까지 챙겨주고 나니 사실상 본인 인건비는 월급쟁이 때만큼도 남지 않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원래 다니던 회사에 재입사를 할 예정이라고 고백하며 덧붙인 말이 내 마음을 후벼 팠다. “드라마 ‘미생’에서 그랬잖아요. 회사 안은 감옥이고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그 말이 딱 맞아요. 힘들어도 어떻게든 퇴사하지 말고 오래오래 회사에서 버티세요.”
월급쟁이든 자영업이든 그 나름의 고충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안팎으로 접한 밥벌이의 고됨이 유달리 진하게 느껴지는 이웃들의 이야기였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는 언젠가 “남의 돈에는 칼이 들어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무엇이 되었건 칼을 삼키듯 힘든 일이라는 뜻이었는데 요즘만큼 그 말이 마음에 맺히는 적이 없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먹고사니즘’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사회생활 7년 만에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나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침에 눈을 떠 일터로 가고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집으로 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가정과 사회가 지탱되고 있다. 우리 개개인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하루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물론 경제가 돌아가고 있음이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그 무게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3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이 무게를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몇 십 년 동안 시장에서, 가게에서, 야외에서, 빌딩 숲에서 먹고살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는 수많은 인생 선배들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나도 그렇게 그들처럼 또 하루를 쌓아가고 있으리라 믿으며, 오늘도 밤늦게 택시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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