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사옥 집무실에서 창밖을 본다. 오늘은 어쩐지 수많은 고층 빌딩이 애잔하다. 저 높은 빌딩을 세우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샐러리맨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해가 저물어 노을이 빌딩을 감쌀 때야 샐러리맨들의 속살을 본다. 사무실 한쪽에 쌓인 서류 무더기, 뚜껑이 닫히지 않은 펜, 커피 잔이 가득한 회의실 곳곳에서 그들의 삶이 느껴진다.
이렇게 공간을 보면 거기에 머무는 사람의 내면까지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인 집 안의 흔적은 내 모습 그대로다. 공기보다 더 가벼워서 잊고 지낼 뿐. 스치는 모든 공간에 내 기억과 감정은 조금도 부족함 없이 담겨 있다. 예상치 못한 어느 날에 문득 기억 한 부분이 떠오르거나, 가족이 서로 다른 기억을 맞춰야 겨우 온전한 하루가 완성되기도 한다.
나는 오래된 한옥에 산다. 예스러우면서도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다.
한옥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하는 말이 “멋있겠네요”다. 그렇다, 그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이런 곳에 살고 싶네요.” 어쩌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부러운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부러우면 한번 한옥에 살아봐요. 며칠뿐일 테니까”라고 말한다. 한옥, 솔직히 불편하다. 전통 한옥에 사는 게 얼마나 손이 가고 귀찮은 일인지 예전에도 어느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내가 서울 혜화동에 지어진 지 110년이 훌쩍 넘은 한옥에 50년 넘게 사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일찍이 문화재로 등록한 영향이 크다. 긴 시간만큼 추억도 많다. 우리 가족의 역사가 모두 이 한옥에 깃들어 있다. 불편함의 역사도 함께. 한옥에 사는 불편함은 대략 이렇다.
난방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기까지 꽤 오랫동안 난 보초를 섰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던 시절이었다. 군대에 다녀와서 기름보일러를 놨는데도 할 일은 태산이었다.
신혼 초기 아내는 나무 마루에서 나는 “삐걱삐걱” 소리를 무서워했다. 사생활도 완벽하게 보호받지 못했다. 한옥 자체가 열린 공간인 탓이다. 한겨울엔 이중창을 달아도 마루 밟는 발바닥에 냉기가 돌고 입에선 김이 났다. 아이들도 “난 커서 한옥에는 안 산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장마철이면 기와에서 비가 샐까 노심초사하고, 가을엔 쥐가 나무를 파먹지 못하게 쥐덫을 놓았다.
요즘은 고칠 데가 생겨도 서까래와 기와 다루는 장인을 구하기 힘들다. 당연히 수리비도 만만치 않다. 한옥을 짓는 비용이 양옥보다 세 배 더 든다고 하니 한옥살이를 택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 집처럼 문화재로 지정되면 집주인 마음대로 손도 못 댄다. 이런 번거로움 탓인지 집 주변에 그 많던 한옥이 시나브로 사라졌다.
그런데 난 왜 여태 한옥에 사는 걸까. 역설적으로 순전히 집으로서의 실용성과 그 이상의 무형적 가치 때문이다. 아파트처럼 고급 브랜드가 없어도 한옥에서는 멋스럽게 살 수 있다. 손이 많이 가는 불편함은 거꾸로 우리를 좀 더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폐쇄적인 사생활보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알려줬다. 한옥 특유의 여백과 곡선미는 ‘느림의 미학’을 일깨운다. 한옥에서 우리 아이들은 감수성이 고운 어른으로 자랐다.
오래된 한옥이 주는 따뜻함은 빛나지만 눈부시지는 않아 좋다. 그것은 우리 집을 지나가는 뭇사람도 위로한다. 내가 한옥 지킴이 운동에 나선 배경이기도 하다. 만약 수십 년 동안 이 집에 살지 않았다면 한옥의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있었을까. 나는 오늘도 마당 한쪽에 있는 연못에서 잉어를 돌보고, 아내는 화초를 키운다. 계절마다 마당을 거닐며 아이들이 내딛는 걸음에 볕이 들기를,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내 부모님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헤아려 갔다. 이렇게 불편한 한옥에서 우리 가족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했다. 또 함께 희망을 키웠다. 한옥이 주는 따뜻한 위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안다.
자, 이렇게 보니까 한옥이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집처럼 되지 않았는가. 확실한 건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옥에 사느냐고? 집에 기대하는 것이 편리함은 아니니까. 살아보니 확실히 알겠다. 집은 편리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들이 돌아올 곳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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