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건 무얼까. 누군가에겐 스마트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늘 만나는 것이 있다. 치킨이나 피자 배달 전단지, 우편물 봉투, 택배 상자와 거기 붙이는 스티커, 행사 포스터, 명함…. 모두 인쇄물이다.
인쇄물을 가장 많이 쏟아내는 곳이 있다.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충무로 을지로 인현동 필동 일대다. 인쇄 관련 업체 5000여 곳에서 1만50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서울지역 인쇄업의 67%, 전국의 30%를 차지한다.
근대적 인쇄는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1910년대 경성고등연예관, 경성극장, 중앙관 등의 영화관이 을지로에 등장하면서 영화 전단지를 찍기 위한 인쇄소들이 생겨났다. 6·25전쟁 이후∼1960년대엔 충무로로 확산되어 인쇄골목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1980년대, 근처 장교동의 인쇄업체 500여 곳이 충무로로 옮겨오면서 인쇄업은 성황을 이뤘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은 충무로의 전성기였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각종 선거가 급증하면서 선거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충무로에서는 단순히 종이인쇄만 하는 게 아니다. 디자인, 편집은 물론이고 코팅, 금박, 스티커, 제본 등 인쇄의 전 과정이 동시에 이뤄진다.
좁은 인쇄골목은 늘 분주하다. 종이와 인쇄물을 실은 오토바이, 지게차, 삼발이가 열심히 오가고 오래된 건물 안에서는 인쇄 기계가 부지런히 돌아간다. 저녁이 되면 이곳 사람들은 삼겹살을 구우며 종이 가루와 잉크 냄새에 지친 목을 달랜다. 노가리와 골뱅이를 안주 삼아 피로를 풀기도 한다. 인근 노가리골목과 골뱅이골목은 인쇄골목과 동고동락해왔다.
그러나 인쇄골목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임대료는 올라가고 미관상 좋지 않다며 재개발 얘기도 나온다. 경기 파주시나 서울 성수동 등지로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10년, 20년 뒤 이곳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재개발로 인쇄골목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수백 년을 이어온 서울 청진동과 피맛길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고 고층빌딩을 세운 것을 보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전 ‘세상을 찍어내는 인쇄골목, 인현동’이 열리고 있다. 전시 문구처럼 충무로는 “수십 년간 우리 삶을 인쇄해온 골목”이다. 이 골목이 청진동, 피맛길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인쇄골목 100년 역사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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