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은 달콤하다. 달콤한 꿀을 얻으려다 몸을 다치는 일도 잦았다. 세종 5년(1423년) 2월 사헌부의 건의. “사천병마사 김득상이 민간에서 부당하게 꿀(淸蜜·청밀)을 거둬들였다. 불법으로 백성의 재물을 탐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조선왕조실록). 김득상으로서는 다행스럽게 사면령 혜택을 봤다. 벌은 주지 않고 물건만 돌려받는 선에서 끝난다.
세종 11년(1429년) 1월, 형조의 보고. 내이포(乃而浦·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천호 조안중이 크고 작은 죄를 저질렀다. 보고 중에 “선군(船軍) 2인의 역을 면제하여 주고 그 대신 청밀 4그릇을 거둬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꿀 4그릇을 뇌물로 받고 배를 젓는 등 힘든 일에서 빼주었다는 것이다. 탐관오리 조안중은 곤장 80대를 맞았다.
꿀은 구하기 힘든 식재료였다.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꿀 채취가 가능하니 꿀이 귀하지는 않았다. 다만 꿀을 모으는 데 공력이 많이 드니 귀했다. 꿀의 용도도 그리 넓지 않아 과자를 만드는 데 가장 요긴하게 사용했다. 제사,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과자(菓子)를 만든다. 왕실이나 민간의 제사, 잔치, 외국 사신의 접대 등에 꿀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그 외에는 약 혹은 귀한 밥상의 감미료로 사용할 정도였다.
선조 35년(1602년) 2월, 사헌부의 보고는 참혹하다.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국가 재정도 엉망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우두머리들의 조반상에 조과를 놓는데 이 조과를 만들 때 반드시 꿀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긴요치 않은데 꿀(청밀) 6석을 마련하니 낭비입니다”라는 내용이다. ‘조과(造果)’는 ‘인위적으로 만든, 과일 맛 나는 과자’다. 선조나 조선의 처지에서는 임진왜란 때 병력을 파견한 명나라의 사신은 잘 대접해야 할 대상이다. 국가 재정이 엉망이니 ‘꿀 6석’도 문제가 된다.
꿀은 귀하지만 민간에서도 사용했고 거래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종 24년(1529년) 5월, 홍문관 유여림의 보고에 꿀을 둘러싼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사건에 등장하는 떠돌이 꿀 장수는 계동이다. 계동을 꾀어 자기 집에 재운 사람은 어리금. 계동은 이미 꿀을 팔아 무명을 샀고 말도 가지고 있었다. 어리금은 계동의 무명과 말이 탐났다. 어리금은 계동을 자기 집에 재우면서 그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한다. 홍문관의 보고는, “사건 내용이 명확하지 않지만 민간에 떠돌고 있는 내용이라서 보고 드린다”고 했다. 꿀 장수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없다. 꿀 장수는 이미 흔하게 있었다.
중종 25년(1530년) 이행(1478∼1534), 윤은보(1468∼1544)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편에 꿀을 파는 가게가 등장한다. ‘청밀전(淸蜜廛)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는 내용이다. ‘하피마’는 ‘아래 피맛골’로 오늘날 서울 종로구 장사동 일대다. 이곳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꿀 전문 가게’가 있었다. 주 고객은 궁중과 세금을 대납하는 공납업자들이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꿀을 세금으로 받는 일에 담당 관리들의 부정행위가 개입하기도 한다. 중종 24년 5월, 대사간 어득강의 건의에는 부패 관리들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궁중(봉상시)에서 꿀을 공물로 받는데 같은 품질의 꿀을 두고 때로는 그대로 받거나 때로는 퇴짜를 놓는다. 퇴짜 맞은 물건도 다음 날 감찰, 봉상시의 관원들에게 청탁하면 그대로 통과되기도 한다. 힘이 없는 사람들의 꿀은 퇴짜를 놓으니 폐단이 크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7년(1639년) 9월 12일에는 생뚱맞은 내용이 등장한다. ‘심양(瀋陽)의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銀子) 500냥을 보내와 면포, 표피 등과 청밀, 백자(柏子) 등의 물품을 무역할 것을 요구하니 조정이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면포, 표피 등은 옷감이고, 백자는 잣이다. 심양 팔왕은 청나라 누르하치의 열두째 아들로 소현세자 일행이 포로로 있었던 심양을 관리했다. 수렵, 기마민족인 청나라로서는 궁중의 사치물자마저도 귀하니 조선 측에 은밀하게 교역을 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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