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대문시장 맞은편에는 1900년대 초에 지은 2층짜리 한옥 상가가 한 채 있다. 서울에서 손꼽히게 번잡한 곳이며 고층 건물이 즐비한 지역이니 “100년 전 집이 아직 남아 있었어?” 하겠지만 대로변에 줄지어 있던 상가용 2층 한옥 중 간신히 한 채가 살아남았다. 근대 서울 도심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서 최근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조 트러스로 지붕틀을 구성하고 붉은 벽돌로 벽체를 쌓았다. 지붕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고 화재에 약한 전통 한옥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당시에 ‘유사 서양식’이니 ‘의양풍(擬洋風)’이니 했다니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나 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살림집으로 2층 한옥이 없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2층 한옥은 생각보다 꽤 있다. 경북 안동지역의 고택들은 지형의 높이차를 이용하여 2층 구조를 만들었고, 전북 진안군, 경남 산청군, 전남 담양군 등에는 전통 한옥에 2층을 도입한 근대 주택들이 있다. 그러나 한옥의 2층은 대개 마루를 깔아 물품을 보관하거나 작업장으로 사용했다. 온돌인 우리 난방 방식으로는 목구조 2층에 난방시설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2층에 온돌난방을 한 한옥이 있다. 경북 상주시에 있는 대산루(對山樓)다. 17세기 영남학파의 사상적 지주였던 정경세(1563∼1633)가 지은 간소한 네 칸 서실에, 그의 6세손 정종로(1738∼1816)가 직각 방향으로 2층 한옥을 붙여 지으며 2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다. 1800년대 초의 일이다.
한옥 2층에 온돌방을 들이기 위해 대단한 발상의 전환을 했다. 1층 상부, 즉 2층의 바닥에 흙을 깔아 일종의 인공 지반을 구성하고 구들을 놓은 것이다. 그 아래는 부엌인데, 부엌 벽체를 돌로 쌓아 마치 2층을 받치는 기단처럼 보인다. 게다가 불 넣는 아궁이는 벽체의 성인 가슴 높이께 있다.
1층과 2층을 연결한 돌계단은 외벽으로 막았다. 외벽의 하부는 돌을 쌓고 상부는 회벽에 학문에 매진하라는 의미의 ‘工(공)’ 자 무늬를 넣어주었다. 비바람을 막기 위한 외벽에 뜻하는 바를 무늬로 담기까지 했으니, 기능과 상징을 장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어떻게 이런 대담한 발상을 했을까? 궁금한 마음은 그 시대로 눈을 돌린다. 정종로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기다. 정치와 경제가 안정된 사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신, 실학자들의 진보적인 사상과 실험정신이 팽배하던 시대였다. 그 과감한 실천이 집중된 곳이 수원화성이다. 수원화성은 새로운 재료와 도구, 평면에서 벗어나 곡면을 구현한 성벽, 공사 진행 방식에 이르기까지 파격이 가득한 현장이었다.
상상은 날개를 단다. “그 시대의 자유로운 실험정신의 공기가 대산루까지 미친 것은 아닐까?” 대산루의 돌로 쌓은 벽체 위 2층 목구조는 마치 석재와 전돌로 높이 쌓은 아름다운 기단 위에 목조 누각이 올라선 화성 방화수류정의 소박한 변용과 같다. 수원화성의 축조 시기(1794∼1796년)도 그런 가능성에 여지를 준다.
요즘 2층 한옥이 꽤 많이 지어지고 있다. 한옥이 인기를 끌면서 서울 인사동 등 작은 필지에 땅값 비싼 상업지역에서 공간을 넓게 쓰려는 방편으로 2층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필지가 작게 분할된 서울의 은평 한옥마을에서는 살림집임에도 적극적으로 2층 한옥을 짓는 추세다.
좁은 대지면적에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2층 한옥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해서 “저게 한옥이냐” “저렇게 지을 거면 양옥을 짓지 왜 굳이 한옥을 짓는 거냐” 등 못마땅하다는 소리도 나온다. 전통 한옥의 비례감과 달라 어색하게 보이는 것, 주로 제재목을 사용하므로 한옥의 전통미보다는 목조주택의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 2층 한옥에 대한 거부감의 주된 이유다.
어느 시대건 새로운 시도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평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옥의 고유 가치를 훼손하면서 내용 면에서 양옥과 다를 바 없는 한옥을 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일리가 있다.
관습을 넘어서는 발상의 전환과 기능 상징 장식을 아우른 포괄적인 디자인 감각, 대산루의 실험정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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