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의 ‘왓 어 원더플 월드’가 배경으로 흐르는 스크린 복판에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아톰’의 플라스틱 인형이 서 있다. 뾰족한 머리끝에 닿은 전기 회전 톱이 멜로디를 타고 흘러내리듯 천천히, 우뚝 선 아톰을 가루로 분쇄한다.
12월 4일까지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는 기획전 ‘페스티벌284: 영웅본색’ 2층 전시실에 걸린 신기운 작가의 영상작품 ‘진실에 접근하기’ 중 한 장면이다. 아톰에 이어 슈퍼맨 인형, 아이팟, 주화 몇 개가 차례로 톱에 갈려 사라진다.
10년 전 만든 작품이지만 새삼스럽다.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2016년 한국에서 ‘영웅’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얼마나 어색한지 실감할 수 있다. 영상을 통해 관람객이 마주하는 것은 때로 분쇄 작업의 되감기다. 가루가 응집해 형체를 찾는다. 형체를 되찾은 듯 보일 뿐 실상은 그와 반대임을 누구나 안다. 은근히 처연하다.
옛 서울역사를 전시 시설로 되살려낸 문화역서울284는 사용하기에도 찾아가기에도 난감한 곳이다. 존재감이 워낙 뚜렷하게 뿌리박힌 공간이라 무엇을 덧입혀도 어색하다. 주변 접근로 환경도 미술 이벤트와 엮어내기 곤란하다. 그런데 이번 기획전의 어색한 표제는 공간의 기운으로 인한 어색함을 상당히 상쇄한다. 균질함과는 거리가 있는 구성임에도 묘하게 자연스럽다.
1층에 놓인 장지우 작가의 ‘프로젝트: 영웅 되기’는 ‘싼 티’로 범벅을 해놓은 영상설치물이다. 이걸 미술 전시 작품이라 해야 할지부터 의문이다. 작은 전시실에 캐릭터 모형과 만화책으로 가득한 자취방을 꾸며놓고 책장 뒤에 어설프게 ‘히어로 본부’를 차려놨다. 배트맨 기지의 대형 컴퓨터를 본뜬 듯 보이는 조악한 제어판 위 스크린에 쫄쫄이 전투복을 입고 괴물과 싸우는 히어로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얼기설기 제작해 틀어놓았다. 1980년대 TV 로봇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주제가도 잔잔히 흐른다.
맞은편 전시실은 대조적으로 엄숙하다. 한 노인의 나신을 표현한 레진 입상을 중앙에 놓고, 그 노인이 걸어온 삶의 자취를 담은 고풍스러운 기록화를 벽에 빙 둘러 걸었다. 액자는 하나같이 화려하다. 대단한 위인인 듯 보이는 이 노인은 6인 작가그룹 설치프로젝트 ‘모조 기념사업회: 최평열 과장 기념관’을 주도한 최수앙 작가의 부친이다. 청동을 녹여 빚은 듯 보이는 두상은 석고상에 그럴싸하게 색을 입한 것이다. 작가는 “평범한 이의 행적과 모습을 고급스러워 보이는 기념물에 담아냄으로써 ‘기념되는 인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2층 홀에는 중국 작가 장웨이의 ‘가상극장’(2015년)을 놓았다. 언뜻 스티브 잡스나 앤젤리나 졸리 등 유명인의 얼굴을 찍은 대형 사진을 늘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미지의 재료는 중국인 300명의 얼굴 사진이다. 샘플 300개에서 필요한 요소를 따내 컴퓨터로 조합해서 누군가의 얼굴처럼 만든 것이다. 영락없이 그 사람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 사람의 얼굴이 아닌 셈이다.
옆방에 놓인 신건우 작가의 ‘초인을 위한 세례’ 연작도 묘하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능욕하는 장면을 담은 14세기 유럽 회화를 기본 틀로 삼아 기괴한 형상의 레진 부조를 빚었다. 질감은 장난감 캐릭터 인형과 다름없지만 중량감이 예사롭지 않다. 허허롭다 하기도, 알차다 하기도 어려운 전시다. 찾아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의 재미는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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