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나 갤러리에는 가급적 작품에 대해 아무 사전정보 없이 찾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11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갤러리에서 열리는 오민 작가(41)의 개인전 ‘일 이 삼 사 1 2 3 4’는 그 믿음을 다시 확인시켰다. 갤러리 출구에서 받아온 안내책자를 읽어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봐도 이해할 수 있는 바가 거의 없어 결국 광주비엔날레에 방문 중인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1시간 정도 통화한 후에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지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더 굳었다. 멋대로 돋워낸 관람자 몫의 상상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씨는 서울대에서 피아노와 산업디자인을 잇달아 공부한 뒤 미국 예일대 대학원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학업의 경로를 바꾼 까닭을 묻자 그는 “연주자는 혼자 수양하는 역사학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을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 답했다.
“음악이 아름답다고 할 때 대개 순간적인 느낌에 대해 언급한다. 듣고 있는 음악이 얼마나 정교한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따지는 이는 드물다. 그 구조의 아름다움을 조형적으로 재배열해 시각에 전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그래픽과 영상 작업의 재료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1악장이다. 소나타의 제시-발전-재현 형식을 ABA라는 기호로 대체해 구성한 다이어그램을 외벽 통유리창 안쪽 공간에 걸었다. 전시실에서는 그 다이어그램을 기초로 ‘연주’한 퍼포먼스를 편집한 영상을 상영한다. 일본인 무용가가 잡다한 사물들을 탁상 위아래에 깔끔하게 정렬하는 모습과 소리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대상을 이해하는 나만의 체계를 만들고 싶어 시작한 작업이다. 서구에서 계이름을 만든 과정을 생각하며 의혹과 죄책감을 덜어내 왔다. 이 방식에 익숙해져 다른 속박을 스스로 만들 위험은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덜어내고 있다.”
작가와의 대화는 즐거웠으나 전화를 끊은 뒤 라흐마니노프 소나타를 들으며 다시 다이어그램을 들여다봐도 전혀 그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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