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문 안쪽에 스케치북 사이즈만 한 코르크 보드 하나를 걸어두었다. 잊고 싶지 않은 글귀나 그때그때 필요한 메모들을 압정으로 고정시켜 놓고 작업실을 오갈 때마다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감 날짜가 지난 원고 청탁서를 떼려다가 오랜만에 그 보드 앞에 멈춰 서서 벌써 수개월째 혹은 1, 2년이 지나도록 떼어내지 못한 것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카뮈의 흑백사진도 있고 외우고 싶은 시와 메모들, 스승의 날에 받았던 학생들의 카드도 한 장 있었다. 단단히 눌러둔 압정을 빼내고는 그중 몇 개를 떼어낸다. 어느새 11월이니까 서랍 속이든 장롱이든 마음이든 천천히 정리를 시작하는 게 좋겠지. 촉이 짧고 대가리가 얇은 녹슨 압정 몇 개가 손바닥에 덜렁 남는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작가 아모스 오즈의 자전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춥고 외로운 집에서 혼자 노는 방법을 익혀야 했던 어린 오즈는 어느 날 아버지 책상에서 클립, 연필깎이, 공책 몇 권, 잉크병, 지우개, 그리고 압정 한 통을 가지고 와서는 그 문구용품들을 장난감 삼아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 “연필깎이와 지우개는 급수탑인 큰 잉크병 양쪽에 세워두고, 연필과 펜으로 울타리를 삼아 전체를 에워싼 다음 압정으로 요새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 후 전투가 벌어지면 어린 작가는 공책은 항공모함으로, 지우개와 연필깎이는 파괴자들, 클립은 잠수함으로, 압정은 지뢰로 만든다. 그 추운 방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은 엄청난 양의 책들이었고.
압정에도 단점은 있다. 한 번 꽂으면 빼내기가 어렵고 핀과 머리에 녹이 슬어 얼룩을 만들고 바닥에 떨어지면 뾰족한 침이 위를 향해 발바닥에 꽂히기 쉽기 때문에 ‘손잡이가 있는 핀’, 즉 푸시핀이 만들어졌다. 수평면과 어떤 각도를 갖는 경사면을 이용하면 물체를 자르거나 구멍을 뚫을 때도 힘이 적게 든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가윗날, 칼날, 못과 송곳의 끝, 압정 핀 끝 부분의 뾰족하거나 살짝 기울어진 면. 누르고 찌르고 절삭하고 꽂는 데도 이런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나 보다. 아무려나 문구 욕심이 많은 나는 푸시핀 이전의, 단점이 많은 이 압정을 새것으로 한 통 더 갖고 있다.
보드판을 정리한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도 떼어내지 못하는 메모가 있다. ‘내 그림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서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늘 미어질 듯한 가책을 느낀다’라고 옮겨놓은 고흐의 일기. 아마도 나는 ‘그림’이라는 단어를 ‘문학’으로 바꿔 읽는 것이겠지. 그 메모지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은 작아도 어떤 의지를 담지 않고는 꾹 누르기 어려운 납작한 원판의 압정. 보잘것없어 보여도 막상 찔린다면 깜짝 놀랄 만큼 아플 게 틀림없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