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 속 한식]숙수(熟手)의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9일 03시 00분


제사상 음식. 조선시대 궁궐 제사상 음식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 숙수들이 만들었다
제사상 음식. 조선시대 궁궐 제사상 음식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 숙수들이 만들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영조 42년(1766년) 8월의 기록. 영조가 영의정 홍봉한(1713∼1778)을 만난다. 홍봉한의 보고다.

 “궁궐 안팎의 제사 등에 병, 면, 포탕을 마련합니다. 이때 여인들에게 음식을 준비하게 하는 일이 잦습니다. 도성의 여러 부서도 궁의 잘못된 전례를 따릅니다. 민폐도 심하고 폐단도 많습니다. 고귀한 일에 내력이 불분명하고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여러 숙수(熟手)들과 뒤섞이게 하는 것도 미안합니다. 봉상시의 숙수들은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병, 면, 탕을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앞으로 봉상시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서 (여인들을 쓰지 말고) 숙수들이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길입니다. 민폐를 없애는 길이기도 합니다.”

 영조의 대답도 간명하다. “몹시 해괴하다. 무례하다. 민폐도 심할 것이다. 엄금하라.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봉상시 해당 관원들의 책임을 무겁게 물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영조와 홍봉한은 사돈지간이다. 홍봉한의 딸이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홍봉한은 세손(世孫)이었던 정조의 외할아버지다. 영의정, 현직 국왕의 사돈, 세손의 외할아버지가 국왕 독대 자리에서 꺼낸 이야기가 “여인들이 음식을 만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봉상시는 제사를 도맡는 부서다. 제사 음식, 궁중의 일상적인 음식을 만드는 일은 유교의 법도에 따라 중요한 일이었다. 민간 반가나 상민의 집에서는 여자들이 음식을 만들었지만 궁중이나 관청의 음식은 철저히 남자들의 몫이었다.

 음식 만드는 일이나 식재료 장만, 물 떠오는 일도 남자의 몫이었다. 음식은 숙수, 선부(膳夫), 재부(宰夫), 옹인(饔人), 수공(水工), 반공(飯工) 등이 만졌다. ‘부(夫)’는 사내, 남정네다. 선부는 반찬, 재부는 고기, 옹인, 반공은 밥 짓는 일을 맡았다. 한양과 지방의 관청도 마찬가지. 음식 만드는 일에 여자들이 끼어드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태종 13년(1413년) 7월의 기록. 사간원의 상소에 ‘뼈’가 있다. ‘예전부터 가뭄이 오면 국왕도 감선했다. 금주 명령이 있지만 여전히 술 취한 사람이 있으니 금주를 엄격히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자면 “국왕인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느냐,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느냐”는 뜻이다. 서슬 퍼런 국왕이다. 마음대로 보위에 올랐고, 살아 있으면서 하야(下野)했고 외교, 국방권을 가졌다. 재위 13년, 살아 있는 권력자가 변명한다. “감선하는 일이라면 나의 주방에 진실로 별미(別味)가 없는 것을 선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선부는 천민 남자다. 이름도 각색장노(各色掌奴), 숙수노(熟手奴)였다. ‘노비(奴婢)’의 ‘노’는 남자 종이다.

 궁궐에서 음식 만드는 일은 힘들었다. 웬만하면 피하려 했다. 숙련된 숙수는 더 귀했다. 인조 3년(1625년) 3월, ‘숙수 사노(私奴) 천해남’을 두고 부처 간의 갈등이 일어난다. 중국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 접대는 영접도감의 몫이다. 숙련된 숙수가 없다. 천해남은 숙련된 숙수다. 불행히도 사옹원 소속, 세자궁 파견이다. 영접도감에서 인조에게 건의한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라도 천해남을 영접도감에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조는 허락한다. 나흘 뒤인 3월 27일, 사옹원이 들고 일어선다.

 “사옹원 소속 숙수들의 업무가 힘듭니다. 교대로, 밤낮없이 궁궐주방에서 일합니다. 이번에 천해남이 영접도감의 숙수로 명령받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궁궐에서 힘든 일을 하는 숙수들을 데려갑니까? 천해남과 사옹원 소속 다른 숙수들을 절대 데려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승정원일기).

 사옹원은 식재료 관리, 음식 만드는 일 등을 하는 부서다. 숙수들은 사옹원 소속이었다. 대령숙수(待令熟手)도 잘못 알려졌다. 높은 직책이 아니다. 밤낮 없이 일하는 ‘궁궐주방 5분대기조’다. 역시 남자다.

 궁중숙수들은 부업으로 그릇 빌려주는 일도 했다. 정조 14년(1790년), 궁중숙수들은 사기전(砂器廛)과 맞선다. 사기전 상인들은 ‘그릇 빌려주는 세기전(貰器廛)’을 만들고 궁중숙수들을 흡수, 일을 독점하려 한다. 자신들이 그릇 빌려주는 일을 도맡고 이익의 일부를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궁중숙수들은 반발한다. 영조 30년(1754년), 이미 세기전, 궁중숙수들이 각자 그릇 빌려주는 일을 나눠 하도록 결정했다. 이제 와서 세기전이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조는 궁중숙수들의 의견을 따른다(일성록).
  
황광해 음식평론가


#영조#숙수#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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