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원의 옛글에 비추다]죽어야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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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그냥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는가

人人徒死 賴誰興復(인인도사 뢰수흥복)

―최익현의 ‘면암집(勉菴集)’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주권을 빼앗기면서 우리 근대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을 맞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자주권의 상실은 그보다 5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에서 시작되었다.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일본인 통감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이라는 방식으로 국권침탈에 항의하였다. 힘없는 개인이 거대한 폭압에 맞서 행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 아마 죽음일 것이다.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한 이유이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죽음과는 다른 길을 택했던 사람이 있다. 최익현은 죽음 대신 의병의 길을 택하였다. 위의 말은 을사늑약 이듬해에 최익현이 집안의 사당에 하직을 고하고 의병을 일으키며 했던 말이다.

 이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울분을 삭일 수는 없더라도 그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험난한 길을 택했던 것일까. 다음의 말에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선비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실천한 것이며,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던 듯하다.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국가에서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었거늘, 힘껏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의리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진압대가 왜병이 아니라 우리 군대라는 소식을 듣고는 싸움을 포기하고 붙잡혔다. 쓰시마 섬으로 압송된 이후 일본인의 총칼에 한 치의 굴함도 없이 당당히 맞섰으며, 굶어죽을지언정 그들의 음식은 조금도 먹지 않겠다며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쓰시마 섬에서 맞은 마지막 길에 유언으로 남긴 상소에서 그는 끝까지 자주(自主)를 강조하였다.

 “참아서는 안 될 것을 참지 말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믿지 말며, 위협을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듣지 말고, 더욱 자주(自主)하는 정신을 굳게 하시어 남에게 기대려는 마음을 끊으소서.”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면암(勉菴)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가 생을 마감했다.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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