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인가, 막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3학년 조카가 결연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큰 이모, 나연이는 커서 꼭 평민이 될 거야.” 나는 오랜만에 듣는 ‘평민’이라는 단어에 잠깐 주춤하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학교에서 계급 사회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양반들은 나쁜 짓을 많이 하고 평민들을 못살게 구는 것 같아서 자기는 착한 평민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그때 나와 그 애의 부모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조카는 알지 못하겠지.
동생네가 이사해서 조카들은 처음으로 자기 방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 간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채 꾸며놓지 못한 방들을 둘러보았다. 5학년짜리 남자애 방에는 동화책들을 꽂아둔 책장이, 평민이 되겠다고 한 여자아이 방 창틀에는 캐릭터 깡통 저금통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생긴 적립금이라는 것으로 몇 가지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하더니 저금통을 고른 모양이었다. 지갑을 열어서 동전들을 저금통에 넣어주었다. 빈 깡통에서 쨍그랑, 쇳소리가 났다.
20대 초반에 처음 내 방을 갖게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책장을 들여놓곤 문방구들을 돌아다니면서 빨간 돼지저금통을 구해 책장에 올려두었다. 초등학교 때 문방구 입구에 한 묶음씩 걸려 있던 플라스틱 돼지저금통을 찾는 게 의외로 쉽지 않았던 게 생각난다. 새로 나오는 돼지저금통들은 그때 것과 달리 무척 세련돼 보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1970, 80년대 흔했던, 빨간 플라스틱 재질에 눈만 검은색 붓 터치로 그려 넣은 저금통이었다. 윗부분에 커터 칼로 동전 구멍을 뚫게 돼 있으며 엉성하게 복(福)자가 새겨져 있는.
그 오래된 돼지저금통을 여태 쓰고 있다. 저금통이 차면 잘라놓은 아랫부분으로 동전을 쏟아내곤 투명 테이프를 붙여둔다. 이제 이런 촌스러운 저금통은 보기도 구하기도 어렵고, 다 차면 뜯어 동전들을 열심히 세 봐도 채 10만 원도 되지 않지만. 빨간 돼지저금통이라는 건 거기 놓아둔 그 자체로 생활의 복과 부를 기원하는 데 의미가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어제 조카에게 아직도 커서 평민이 되고 싶으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아니. 조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양반이 될 거라고, 그래야 평민을 도와줄 수 있는 것 같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조카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 그러나 ‘양반’이라는 신분의 본질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데 앞장서고 사리사욕이 없어야 하며 평민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는 점에 대해선 현재 말해주지 못할 것 같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배운 대로 알고 있는 아이에게 때로 티끌은 여전히 티끌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조카의 저금통은 귀엽고 단단하지만 내 눈에는 너무 작아 보인다. 연질의 플라스틱 빨간 돼지저금통을 구해서 조카들 방에 놔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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