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라로 떠나고 싶다면 ‘일본 속 일본’ 이시카와를 권한다. 일본이라는 공간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천 년의 시간속을 여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깝지만 낯선, 이시카와 현
이시카와를 ‘일본 속 일본’ 또는 ‘안의 일본’이라 부르는 이유는 우선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이시카와는 태평양 쪽 밖이 아닌 안, 즉 동해에 접해 있다. 따라서 한반도와 가까워 이시카와 북쪽인 노토 지방은 발해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 처음 도착한 곳이었고, 중심 도시 가나자와는 조선통신사가 귀국길에 들르던 곳이었다.
이 같은 지리적 이유 외에 이시카와의 특별한 색깔은 일본 문화, 특히 화려한 에도 시대의 정수를 온전히 보전해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16세기 말 전국 시대 유력한 무사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는 이 지역에서 번주로 자리를 잡자 정치력을 발휘해 전쟁을 피했다. 이후 마에다 가문이 통치한 2백85년 동안 이시카와는 일본 막부 시대의 혼란과 전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높은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로 비옥한 평야에서는 좋은 쌀이 나왔고, 바다에서는 신선한 해산물이 났다. 전쟁을 피해 온 귀족과 예술가들은 문학과 철학을 발전시켜 일본을 대표하는 ‘선(禪)’ 사상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에게 호화로운 생활용품을 공급한 장인들로 각종 공예 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오늘날 서양인들이 열광하는 화려한 채색 회화 도자기 ‘구타니야키’,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칠기 ‘와지마누리(이시카와 현 와지마의 이름을 따왔다)’, 동그란 형태와 붉은색이 특징인 ‘야마나카 칠기’, 일본 내 생산 99%를 담당하는 ‘가나자와 금박’, 사실적 회화를 고스란히 천에 담아낸 염색 ‘가가유젠’ 등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일본의 고급 공예 기술은 대부분 에도 시대 이시카와 현에서 완성된 것들이다.
이시카와에서 1백 년의 역사란 극히 가까운 ‘현대’의 시간에 불과하다. 2천 년 이상 된 사찰, 1천3백 년 전부터 사용된 온천들, 4백 년 이상 버텨온 목조 건물들, 3백 년 넘게 매년 새로운 사케를 만들어온 양조장들이 적지 않고, 아예 수천만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 신비로운 원시림이 있다. 이시카와는 무한한 우주와 시간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FOR -일본 여행 좀 해봤다는 말을 듣는 상급 여행자 -유니클로 신상보다 일본의 전통 예술품을 찍어 SNS에 올리고 싶다면 -패키지 관광은 사양, 최고 수준의 식문화와 료칸을 원한다면 -기념사진 찍는 관광은 그만, 일본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면
AGAINST -여행의 목적이 쇼핑인 사람 -무박이일 여행 계획자
이시카와의 중심, 가나자와의 맛과 멋
이시카와 현청 소재지인 가나자와 시는 현대적인 대도시인 동시에 ‘작은 교토’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도시 전체에서 에도 시대의 정취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을 통치한 마에다 가문이 거주한 가나자와 성의 납 지붕이 새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식물의 식생을 정교하게 계산해 4계절의 풍경을 그림처럼 조성한 일본의 3대 정원 겐로쿠엔이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에도 시대 게이샤들과 무사들의 사교장 ‘차야가이’들이 오늘도 성업 중이다. 관광객들을 부르는 고급 요정으로 변하긴 했지만.
가나자와의 호사스런 식문화는 일본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다양하고 신선한 식재료, 감탄을 자아내는 테이블웨어, 전통적 손님 접대 예절 ‘오모테나시’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가나자와의 맛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초밥 장인 ‘다이쇼’들이 운영하는 클래스에 참여해 초밥 쥐는 법을 배워보도록 하자. 초밥을 알고 격조 있게 즐기는 법만 배워도 충분히 가치 있는 체험이 될 것이다.
또한 도쿄 등에서 커다란 부티크를 운영하는 ‘후쿠미쓰야’의 양조장이 가나자와에 있으니 꼭 들러볼 것. 1625년 문을 연 후쿠미쓰야는 가나자와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다. 가나자와의 명산 하쿠 산에서 내려온 물과 품질 좋은 쌀로 정성스럽게 사케를 빚는 과정을 견학할 수 있고, 전통 산업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양조장 사람들의 피부결이 유달리 고운 데서 착안한 쌀 발효 화장품, 쌀 시리얼 등 식품과 도자기 술잔 등 술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야성적인 이시카와의 자연, 가가
길게 뻗은 이시카와 현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가가는 일본의 3대 명산인 하쿠 산의 품속에 안겨 있는 지역이다. 끝없이 이어진 아름다운 계곡과 각종 질병에 효험을 보인다는 온천들로 유명하다. 특히 야마나카 온천 지역은 다이쇼지 강이 흐르는 가쿠센케이 계곡의 화려한 단풍으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아직 외국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호젓하게 산책로를 걷고 조용히 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궁극의 일본 요리는 역시 가이세키 요리로 특히 가가는 도쿄 아카사카, 교토 기온와 함께 3대 가이세키 요리로 꼽히는 지역이니 꼭 즐겨보자. 다다미방에 앉아 계절의 맛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테이블 세팅, 이 지역 전통 채소인 가가야채, 제철 해산물을 천천히 감상해볼 것.
가가는 717년에 지어진 고찰 나타데라로도 유명하다. 2015년 〈미슐랭 그린가이드 재팬〉에서 별 한 개를 받았다. 경내에 웅장한 기암이 펼쳐져 있고 본존도 암벽 동굴에 있다. 사찰 터를 넓게 닦은 것이 아니라 숲의 빈 공간 여기저기에 절묘하게 사찰 건물을 세웠다. 나타데라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역시 단풍철이다. 이시카와의 해양 문화, 노토의 매력
알파벳 F자 형태의 이시카와에서 오른쪽으로 뻗어 있는 지역이 노토 반도. 관광객들과 아기자기하게 꾸민 관광지에 신물이 났다면 이곳에서 일본의 낯설고 순수한 매력에 빠져보자. 어촌 특유의 까만 기와지붕 집들, 독특한 일본식 염전촌을 볼 수 있고,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기간에 방문하면 1백80개 마을에서 농업과 바다의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쓰리’ 행사의 장관도 구경할 수 있다. 마쓰리는 일본 전역에서 벌어지나 가마에 ‘기리코’라는 거대한 등을 다는 지역은 노토 반도뿐이다. 2천1백 년 된 신사 게타타이샤와 1910년대 보존 건축물들이 이어진 잇폰스기도리도 노토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잇폰스기도리는 간장, 양초, 필기구 등을 귀족들에게 납품했던 가게들이 모여 있으므로 일본의 전통 공예품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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