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바깥의 불신과 반발은 더욱 신랄했다. 해가 바뀌어 1881년 2월, 영남 지역의 유생 1만 명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만인소(萬人疏).
“이 책에 이르기를, 조선의 급선무는 러시아를 막는 것인데 러시아를 막으려면 중국과 친목하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이 최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러시아나 미국이나 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들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평가였다. 상소에 대해 국왕은 이렇게 답한다. “조선책략의 글은 애당초 깊이 파고들 것도 없지만, 그대들도 잘못 보고 잘못 지적함이 있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면서 개방정책을 밀고 가려는 고육책이었지만 상소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갔고 한 달 뒤 이런 상소도 나왔다.
“조선책략과 같은 외국 책들을 샅샅이 색출해 종로거리에서 불태우고 예수교 배척 의지를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이 성벽처럼 뭉친다면 어찌 일본 서양 러시아의 강대함을 걱정하리오.”(1881년 3월 23일자)
성리학에 입각한 전통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유생들에게 ‘조선책략’이 제시하는 미래 구상은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충격적 지각변동이었다. 그런 유림에게 상소는 강력한 시위 방식이었다. 만인소라는 이름의 대규모 연명 상소는 거국적 정부 규탄 운동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100만인 서명 시국성명 같은 것이랄까.
국론의 분열 속에 다음 해 미국과 국교가 수립되었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물리적 충돌로 치닫는 서막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그 직후 이채로운 상소 하나가 출현했다.
“우리나라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이제껏 외교라고는 해본 적이 없기에 견문이 넓지 못하고 시국에 어둡습니다. 다른 나라와 교류하고 조약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외무(外務)에 좀 마음 쓰는 자를 보면 대뜸 사교(邪敎)에 물들었다 지목하여 비방하며 침 뱉고 욕합니다. 백성들이 동요하며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는 것은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882년 8월 23일자)
이 단독 상소자의 이름은 지석영(池錫永). 27세. 아직 벼슬 해본 적 없는 점에서는 집단 상소 시위의 다수 유생들과 같았으나, 전대미문의 종두법을 나라 밖으로부터 받아들여 그 시행 보급에 홀로 몰두하는 새로운 종류의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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