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산수화입니다. 무릉도원을 찾아 헤맨 안평대군의 꿈을 담았지요. 산수화는 왼쪽 현실세계를 출발해 도원 입구를 거쳐 오른쪽 이상세계에 도착하며 마무리됩니다.
민정기(1949∼ )의 ‘유(遊)몽유도원도’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의 세상이 더 있습니다. 15세기 산수풍경에 21세기 홍제천 일대 풍광을 덧대 놓았지요. 그림 속 건물과 나무, 고가와 자동차, 지붕과 골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풍경이군요. 이런 시점은 ‘몽유도원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상향을 표현한 부분이지요. 자연을 현실보다 나은 곳으로 여겼던 당대의 산수관이 반영된 것일까요. 산수화의 시점은 복숭아꽃 만발한 별천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높아져 마침내 세상을 굽어보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전을 재해석한 그림 속 현재의 삶터가 산수화 속 낙원과 같은 시점입니다.
실제 경치는 화가 예술의 진지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림 속 구체적 지명을 가진 장소들은 직접 찾아본 곳이라지요. 그렇다고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거나 고요히 바위에 앉아 자연을 즐기며 바라보는 과거의 선비를 상상하면 안 됩니다. 맛집을 찾거나 인증 사진을 남기며 명소를 관광하는 오늘날의 나들이객을 떠올려서도 안 됩니다.
화가는 그곳에서 현재 터 잡고 사는 이들의 삶을 세세히 살폈습니다. 지명의 유래와 전해오는 이야기에 깃든 땅의 역사에 열심히 귀 기울였지요. 눈앞 세상에 관심 있게 다가서기도 하고, 겸손하게 물러서기도 했어요. 이 과정에서 해당 장소를 최적화할 시점도 결정했습니다. 산 정상과 마을 어귀, 향교 정면과 사찰 측면 등. 화가 예술은 일관된 시점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실경은 보기 좋은 경치가 아닌 이해의 대상이었지요. 나와 타인의 삶이 만나고,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잇는 사건의 장이었어요.
그림 속 어제의 산수와 오늘의 풍경이 이웃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붓질이 웅장한 산 같고, 유려한 구성이 흐르는 물 같은 대작을 보며 왜 하필, 모순 가득한 우리 사회를 지옥에 비유한 표현이 떠올랐을까요. 꿈꿀 자유가 좌절된 현실이 팍팍해서겠지요. 냉엄한 현실을 외면한 비전이 공허해서겠지요. 선인들이 동경했던 이상세계와 동시대인들이 살아가는 현실세계가 꿈처럼 공존하는 그림 앞에서 우리 시대의 고단함과 헛헛함의 진짜 이유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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