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은 유럽 음악계에서 ‘자작자연(自作自演)’의 시대였습니다. 자기 작품을 자기가 연주한다는 뜻입니다. 차이콥스키와 시벨리우스는 대작곡가이면서 능숙한 지휘자였고, 쇼팽과 리스트, 브람스는 청중을 감전시키는 엄청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국가 간의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서로 국적이 다른 차이콥스키 그리그 브람스 드보르자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말러와 시벨리우스가 교향곡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토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연주여행을 다니며 만났기 때문입니다.
한 번 얼굴을 보고 맺은 우정은 다음번 만남의 약속과 편지 교환으로 이어졌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유럽 대륙을 종횡으로 이어준 철도망의 구축은 ‘작곡가 겸 연주가(또는 지휘자)’들을 그물망처럼 이어주었습니다.
오늘날 ‘작곡가 겸 연주가’의 전통은 퇴색된 듯이 보입니다. 음악계 각 영역의 전문화가 강조되면서 작곡가는 작곡에만, 지휘자는 지휘에만 힘쓰게 된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지휘하는 작곡가, 작곡을 하는 지휘자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 서울 부산 대구에서 열린 폴란드 오케스트라 ‘신포니아 바르소비아’ 연주회에서는 20세기 작곡계의 거장으로 불린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가 지휘봉을 들고 자신의 곡을 연주했습니다.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가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상임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의 지휘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임동혁이 협연하는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과 함께 토머스 자신이 작곡한 ‘아그네그램’이란 곡을 선보였습니다. 이 악단의 후원자였던 아그네스 앨버트를 기념해 쓴 곡입니다.
클래식 음악은 작곡가와 연주자의 개념을 분리하고 있고, 일단 작곡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연주자의 것이니 ‘작곡가 자신의 해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작곡가의 의도를 그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지난 세기 초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자작 피아노곡 음반을 들어보고 싶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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