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진행되던 5월 초.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9)의 선거 캠프는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70)를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했는데, 민주당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75)은 패배 선언을 하지 않고 있다”며 이렇게 호소했다. 클린턴이 당내 경선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선 본선에서 맞설 트럼프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는 얘기였다.
결과적으로 클린턴은 ‘샌더스 현상’은 이겨냈지만 ‘트럼프 현상’은 넘어서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클린턴의 적은 둘(샌더스와 트럼프)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였다.
“샌더스와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첫째, 현재의 워싱턴 기성정치 시스템에 분노하고 있고 둘째, 자신의 경제적 삶이 다른 세력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끼며 셋째, 이렇게 잘못되고 있는 미국을 바로잡을 정치인은 내가 지지하는 후보(샌더스 또는 트럼프)뿐이란 생각이다. 이들은 클린턴을 싫어하는 것도 똑같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클린턴이 거짓말쟁이여서’ 싫다고 하고, 샌더스 지지자들은 ‘클린턴이 월가의 대형 금융자본과 가까워서’ 싫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가 올 2월 샌더스와 트럼프 지지자를 각각 수십 명씩 심층 인터뷰를 해서 보도한 기획 기사의 핵심 내용이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선 “클린턴이 샌더스와 트럼프가 아니라, 결국 뿌리가 같은 ‘샌더스 현상’과 ‘트럼프 현상’을 적으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대응했다면 선거 결과(클린턴 패배)는 달라질 수 있었다”는 자성론이 나온다.
샌더스의 신간 ‘우리의 혁명-믿을 수 있는 미래’(사진)는 464쪽의 자서전이지만 책 분량의 절반 이상을 ‘새로운 미국을 위한 의제들’로 채웠다. 자신이 살아 온 인생 이력이나 경선 과정의 여러 일화보다 ‘패배한 민주당은 어떻게 민심을 되찾아올 것인지, 망가진 미국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과두정치의 타파 △몰락하는 중산층 되살리기 △불평등한 경제 시스템의 종식 △의료보험 개혁 △공립대학 무상 교육 실현 △기후변화 대처 등에 대한 철학과 정책을 소개했다. 서문에서 “내 선거 캠페인은 ‘단순히 정당(민주당)이 아니라, 한 세대를 왼쪽(진보)으로 이동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내 캠페인은 단지 대통령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근본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무소속 사회주의자’로 버몬트 주에서 4선 시장(벌링턴 시), 8선 연방 하원의원, 재선 상원의원을 지낸 샌더스는 선거 때마다 “유권자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 한다”며 ‘자서전 출간’을 권유받곤 했다. 그는 번번이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지 말고, 내가 외치는 이슈와 정책을 봐 달라. 심화하는 임금 불평등 같은 미국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를 다뤄 달라.”
그의 자서전이 민주-공화 다른 후보들의 ‘선거용’ 저서들과 달리, 선거가 모두 끝난 뒤에야 발간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샌더스의 정치 혁명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지 모른다’는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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