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베껴 쓰는 필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학생 아르바이트다. 중국 한나라의 수도에 있던 태학(太學)에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책을 베껴 주고 돈을 벌었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문자를 아는 이들이 독점한 일감이다. 후한(後漢) 시대 명장 반초(班超·33∼102)도 관청에서 문서를 베껴 써주고 생계를 꾸린 적이 있다.
“책 한 권을 얻으면 반드시 보고 베껴 썼다. 그렇게 읽은 책이 수만 권이며 베껴 쓴 책이 수백 권이다. 어딜 가든 종이, 벼루, 붓, 먹을 갖고 다녔다.” 이덕무(1741∼1793)의 아들 이광규가 부친을 회고한 말이다. 인쇄본을 살 형편이 못 되었던 이덕무는 책을 필사해야 했다. 책을 자주 빌려준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책 베껴 쓰는 사람을 보고 부지런함이 지나치다 비웃은 적이 있는데, 나도 그 사람처럼 하다가 손까지 부르텄으니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오.”
서양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사 사자생(寫字生)들이 성서와 기도서를 비롯한 책들을 정성들여 필사하고 장식하였다. 슈폰하임 수도원 원장으로 귀중 사본(寫本) 수집에 열중했던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1462∼1516)가 사자생을 찬미하며 말했다. “필사를 하는 수도사는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쓴다. 필사를 하면서 이해력이 높아진다. 믿음의 불꽃이 밝게 타오른다. 내세에 큰 보상을 받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널리 보급된 뒤 책을 통째로 필사하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중요한 부분을 따로 적어 정리해 두는 초출(抄出)은 계속 성행하였다. 지식인의 서재에는 그렇게 초출하여 만든 비망록 성격의 두꺼운 노트가 있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필사는 자료 수집의 필수 절차였다. ‘대미관계 50년사 글을 썼다. 도서관에 가서 통서일기(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를 초출하다가 매우 머리가 무거움을 느껴 곧바로 돌아왔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문일평(1888∼1939)이 ‘대미관계 50년사’를 쓰던 무렵 1934년 9월 28일자 일기의 한 대목이다.
문일평이 수고스럽게 필사한 이 고종 시대 외교 기록을 지금은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에서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필사의 시대와 복사의 시대를 지나 다운로드의 시대가 되면서,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은 넘쳐난다. 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이해력과 통찰도 깊어졌을까. 진정한 지식정보화 사회는 지식의 양적 입력과 질적 출력이 비례하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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