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서 한옥으로, 그 외에는 ‘집’이라는 개념이 사라져 버렸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옥에 살면서 그것이 사람의 집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칠순이 넘어 다시 한옥으로 짐을 풀면서 이상하게도 그 중간의 집이 사라지고 한옥에서 계속 살았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딱 복숭아씨만 한 집이지만 이곳이 고향이고 이곳에 들어서서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가 문을 열 것 같고 “배고프지?” 하며 내 입에 재빠르게 삶은 알밤 하나를 넣어 줄 것 같은 집, 이모가 보이고 나와 줄넘기를 하자고 달려올 것만 같다. 그렇다. 한옥은 모성적 집이다. 모든 시름도 안아 감싸줄 것 같은 엄마의 품속 같은 집이 한옥인 것이다. 이곳이 아름다움에 관한 모든 것을 상상하게 되고, 잘못해 살짝 찢어진 한지창의 구멍이 어린 날의 추억을 한꺼번에 내 앞에 풀어 놓기도 한다.
한옥은 더도 말고 외갓집 같다. 솜이불처럼 따스하고 편안하다. 외할머니가 넘어진 날 일으키며 “아이고 우리 새끼” 하시며 “아픈 데는 없냐?” 하면 갑자기 울어젖히던 내 손을 잡고 “호오, 호오” 하며 불어주시던 외할머니가 한옥 자체라고 나는 말한다. 그렇게 정이 배어나고 웅숭깊다. 내가 사는 한옥의 툇마루는 과장 없이 꽈배기 하나만 한데도 거기 정이 쌓여 있고 정겨운 목소리가 고여 있다. 미운털이 조금도 없는 순하고 예쁜 추억들이 아기 손바닥만 한 마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나무향이 말동무를 해주기도 한다. 늦은 밤 내 속울음을 침묵으로 누르는 것을 나무향이 달래주기도 한다. 내가 나무에 스미고 나무가 내 안으로 들면 그것이 한 조각의 자연이 되는 순간을 나는 경험한다. 자연 한 폭을 내 집으로 가졌다는 보람은 내게 있어 큰 위로이다. 순수한 자연의 공감이며 내밀한 벗을 지닌 작지만 큰 풍요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내면의 왕래를 의미한다. 한옥은 나무로 대화하고 순한 한지창의 아슴한 그림자로 사람의 상처까지 쓰다듬는다. 그것이 치유이고 회복이 아니겠는가.
나무 기둥에 그림 하나를 걸기 위해 못 하나를 치면서 “미안해”라고 말해 본 경험도 처음이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 것을 보면 나무도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게 집이 되어 가는 것이 한옥이다.
한옥은 그렇게 내게 집이 되어 가고 그 집은 내게 심성에 대해 가르친다. 한복 치마처럼 넉넉하게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이상하다. 내가 사는 한옥은 할아버지 노방저고리 단추만 한데도 그 목소리는 굵고 당차다. 한옥은 품성을 가르친다. 나이가 들면서 속이 좁쌀처럼 좁아지고 잘 비뚤어지는 내 심성에게 넉넉하라고, 그리고 부드러워지라고, 그리고 욕심을 내지 말라고 이른다. 한옥에 사는 일은 또 하나의 스승을 가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옥의 모든 공간은 바로 사람의 품성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스르르 부드럽게 치켜세운 지붕 처마가 그것을 말해 주고, 죽 뻗어 세운 나무 기둥이 그것을 말해 주고 천장을 바라보고 누우면 나무들이 통으로 함께 하며 문 밖의 그림자가 스치는 한지창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윽하고 아늑하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곡선의 지붕으로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나는 한옥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대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문은 또 하나의 집이다. 대문은 또 하나의 얼굴이다. 대문은 또 하나의 미소이다. 그 대문을 열어 마당으로 들면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선 것 같은 진정한 집의 기쁨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어깨가 서늘한 날에도 대문 앞에 꽃을 둔다. 집 앞을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집의 주인이 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말이다. 요즘같이 우리 모두가 세상이 허탈하고 아픈 마음일 때 지나가다 꽃의 미소라도 보면서 잠시 상처를 달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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