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는 빗속에 서있는 그를 내다봤고 흠뻑 젖은 모습에 가여움을 느꼈다. “잊지 마.” 키스가 말했다. “너를 봐서 하는 거야.” 몇 시간 뒤, 키스는 관객이 가득한 콘서트홀 객석 앞, 연주할 수 없는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17일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 중 영어 영역 43∼45번 문항 지문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1975년 1월 24일, 독일 쾰른 시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71)의 역사적 명연(名演)에 관한 글. 당시 척추 통증으로 고생하던 재럿은 설상가상 주최자의 실수 탓에 울림이 형편없는 연습용 피아노로 공연을 해야 했다. 필사의 의지로 빚은 이 66분간의 즉흥 연주 실황은 세계 재즈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피아노 솔로 앨범 ‘The K¨oln Concert(쾰른 콘서트)’가 됐다.
‘재즈 피아노의 도인(道人)’으로 불리는 재럿이 최근 새 실황 앨범 ‘A Multitude of Angels’(사진)를 냈다. 발표 전부터 세계 재즈 팬들의 기대가 뜨거웠다. 1996년 10월 이탈리아 모데나, 페라라, 토리노, 제노바 공연 실황을 네 장의 CD에 담았다. 이 녹음을 마친 뒤 그는 만성피로증후군 진단을 받고 2년간 두문불출했다.
재럿은 1970∼90년대에 세계를 돌며 20∼40분짜리 즉흥곡 2∼3개만을 연주하는 파격적인 형식의 공연을 열었다. ‘The K¨oln Concert’가 그 정점. 재럿의 이런 콘서트는 건강 악화로 1997년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이번 음반이 거장의 한 챕터를 닫는 최후의 스케치가 되는 이유다.
평단은 미적 가치 역시 높게 보고 있다. 최규용 황덕호 재즈평론가는 특히 여기 실린 페라라 실황을 백미로 꼽았다. 황 평론가는 “30분 이상 이어지는 재럿의 즉흥연주를 볼 수 있었던 음반은 종전에는 ‘La Scala’(1995년)가 마지막”이라며 “그의 최전성기를 볼 수 있는 이번 음반에서 앙코르로 연주한 ‘Danny Boy’ ‘Over the Rainbow’ 같은 발라드는 재럿 특유의 감성 최고치를 보여준다”고 했다.
아쉽다는 지적도 있다. 김희준 월간 ‘엠엠재즈’ 편집장은 제노바 실황을 추천하면서도 “전작 ‘La Scala’와 흐름이 비슷하지만 지나치게 느슨한 부분 역시 눈에 띈다. 몇 곡을 들어내고 좀 더 압축적인 음반 세트로 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재럿이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어딜까. 최 평론가는 “그는 상상력에 의지해 과감하게 스스로를 내던진 뒤 연주력과 즉흥성을 기반으로 헤집고 나오는 능력에서 최고”라고 했다. 김 편집장은 “코드 진행의 틀, 몸에 밴 도식적 연주를 넘어서는 매우 드문 연주자”라면서 “몰아(沒我)로 투신하는 그의 연주는 30분 안팎을 끊이지 않는 긴 즉흥 솔로에서야 제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1996년 10월, 재럿은 이탈리아의 무대에서 연주는 물론 엔지니어, 프로듀서 역할까지 고집했다. 개인용 녹음기를 무대 뒤에 설치한 뒤 피아노 앞과 무대 뒤를 혼자 오가며 한나절 내내 소리 점검 리허설을 했다. 건강상태는 최악이었다. 저녁식사는 구역질을 참으며 간신히 했다.
‘녹음기를 켠 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본능은 날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녹음할 거리가 없다면 엔지니어와 프로듀서가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음반 속 재럿 본인의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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