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옷장 모양 문이 나타났다. 이 옷장을 통하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19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현대적 상상력이 재미를 주는 몽환적인 공간이다. 파리의 쇼핑몰 쇼윈도를 물끄러미 바라본 뒤 몽마르트르 언덕을 지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카페를 찾는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잔 안에는 디지털 영상이 흐른다. 모든 것이 거꾸로 매달린 파리의 광장도 들를 수 있다.
복잡한 일상에 지친 도시인을 위한 ‘파리의 산책로’가 서울에 등장했다. 프랑스 럭셔리 패션하우스 에르메스가 안내하는 산책로다. 에르메스는 19일 서울 용산구 독서당로 디뮤지엄에 ‘원더랜드―파리지앵의 산책’이란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다음 달 1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19세기 파리지앵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산책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마련됐다. 에르메스 하우스 특유의 웃음을 자아내는 위트와 장인의 깐깐한 디테일도 숨어 있다. 이 전시는 지난해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첫선을 보인 뒤 프랑스 파리,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를 거쳐 이달 서울에 상륙했다. 이후에는 중국과 대만으로 간다.
서울에 온 파리지앵의 산책은 어떤 모습일까. 18일 전시 오픈 하루 전날, 11개 방으로 된 전시장을 ‘산책’해봤다. 19세기 말 파리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를 누비는 듯한 설렘, 곳곳에서 마주치는 우스꽝스러운 상상력에 웃음이 나왔다. 왜 런던, 파리 전시에서 아이들이 특히 즐거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곳곳에 쓰여 있는 산책에 대한 단상은 어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전시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 씨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파리지앵의 산책이 서울에 와서 달라진 점이 있나.
“3가지가 달라졌다. 첫째, 서울 전시는 좀더 인터액티브해졌다. 모든 관람객에게 지팡이를 준다. 지팡이에는 편광렌즈가 달려 있다. 전시 곳곳에 숨어 있는 동그란 화면에 렌즈를 대면 렌즈를 통해서 영상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지팡이 끝에 달린 렌즈로 보면 아무것도 없는 흰색 판에 비둘기 애니메이션이 나타났다. ‘독창성’이라고 쓰인 하얀색 판에 렌즈를 대고 보면 비둘기가 애완견을 끌고 가는 장면이 나왔다. ‘상상력’ 판을 비추니 비둘기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비둘기는 파리에서도 산책할 때 자주 마주치는 새다.)
둘째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부문이다. 11개 방 중 하나는 길거리 예술가의 그래피티를 엿볼 수 있다. 이 그래피티를 서울의 아티스트 ‘제이 플로우’에 맡겼다. 공간을 꽉 채워 재창조한 지하철의 풍경이 아름답다.
셋째는 디뮤지엄의 복층 구조에 맞게 곳곳에 그림을 그려놓았다. 층계로 올라가는 부분에 몽마르트르 언덕 주변을 형상화한 그림을 넣었다.”
―렌즈가 달린 지팡이는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다. 전시에서도 지팡이가 눈에 띈다. 프랑스인에게 지팡이는 무엇인가.
“지팡이는 19세기 교양 있는 남성의 액세서리였다. 산책에 없어서는 안 될 세련된 오브제다. 지팡이마다 손잡이에 주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조각이 있었다.
반면 우산은 여성의 소품이다. 지팡이로 가득 찬 방 천장에 아름다운 우산이 거꾸로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우산은 나와 아트디렉터 피에르 알렉시 뒤마(창업자의 6대손), 무대디자이너 위베르 르갈이 프랑스의 ‘에밀 에르메스 박물관’에서 찾아낸 아름다운 우산을 재현한 것이다. (에밀 에르메스는 창업자의 손자로 수집광이었다.) 그 우산은 꿩 털로 장식돼 있고 우아한 곡선을 자랑한다. 그런데 박물관 소장품은 약한 상태라 가져올 수 없었다. 그 때 에르메스 장인들이 나섰다.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아 장인들이 ‘한 털 한 털’ 꿩 털로 장식해 완벽하게 복원했다.”
―프랑스어로 플라뇌르(산책·fl^anerie)는 지극히 19세기 프랑스적인 단어라고 들었다. 패션전문기자 수지 맨키스는 영어에는 그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일상적인 말이다. 느긋하게 산책을 하다 보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트디렉터 뒤마는 “도시를 거니는 행위 자체가 아름다우면서 자유로운 예술이며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중요한 본질이기도 하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에르메스는 매해 테마를 정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지난해 테마가 플라네르였다.)
느긋하게 걷다보면 관찰자가 되기도 하고,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전시 중에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파리의 광고 기둥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전시가 있다. 가로등도 거꾸로 있다.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 소장품과 디지털이 어우러진 게 눈에 띈다.
“산책은 움직임이니 그런 모습을 디지털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기획할 때부터 디지털을 떠올렸다. 19세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영상 미디어를 통해 현재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시에서 본 벤치 옆에 놓인 우산, 그 밑에 물이 괴어 있다. 그 물웅덩이는 사실 디지털 디스프레이다. 맑게 갠 하늘과 날아가는 새가 간간히 보인다.) ―요즘 한국인들은 스트레스에 빠져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가 뭘 느꼈으면 하는가.
“뭘 봐야지라는 생각보다 여정을 따라가다 문득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누구나 편하게 와서 전시를 보다 보면 ‘도시에서도 즐거운 산책이 가능하구나’란 생각이 들 것이다.” (에르메스의 ‘원더랜드―파리지앵의 산책’은 무료 전시다. 연령 제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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