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규 작가의 수묵채색화 ‘EREHWON’(2009년). 가로 828cm, 세로 346cm의 널따란 한지에 만화 캐릭터를 닮은 코믹한 인물 군상을 빼곡히 채웠다. ‘nowhere’의 철자를 뒤집은 작품 제목은 영국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가 1872년 발표한 풍자소설에서 가져왔다. 금호미술관 제공
물량 공세가 늘 허허로운 건 아니다. 음식을 이것저것 그저 잔뜩 쌓아놓기만 한 뷔페도 허기 면할 목적으로는 효용이 크다. 내년 2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무진기행’전은 그런 면에서 상당한 효용의 전시다. 주제의 맥락은 흐릿하지만 출구를 나서며 확인하는 포만감은 넉넉하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미술관 측은 “안개 자욱한, 시간이 중첩된 소설 속 탈일상의 공간 무진에서 주인공이 체험한 이상과 욕망의 분리 상태를 (전시 관람객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금호미술관에 가서는 대개 일단 지하로 걸어 내려갔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한 층씩 걸어 내려오며 둘러보게 된다. 이번에는 참여 작가 14명의 회화 작품 90점을 각 층에 엇비슷한 분량씩 나눠 걸었다. 레이아웃에서 흥미로운 점을 찾긴 어렵다. 개별 작품의 매력이 경쟁 아닌 경쟁을 벌이는 차림새다. 기자는 지하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다.
▲ 이은실 작가의 수묵채색화 ‘중립적 공간’(2008년). 모호하게 뒤얽힌 공간에 갈라 세운 문의 이미지로 본능이 은폐되는 현상을 표현했다. 지하에 걸린 이은실 작가(33)의 수묵채색화 4점은 전시 표제에도 충실히 부합한다. 벽면의 작가노트에 “인간은 동물로서 딜레마를 겪고 있다. 빛, 바람, 물이 그 사이를 거리낌 없이 흐른다”고 적혀 있다. 이어 걸린 이미지들은 날것의 성(性) 본능이 고상함의 반의어로 여겨지는 위선의 묵약에 교묘하게 항의한다. 장지를 여러 장 겹쳐 붙여 색을 올리면서 세필로 형상을 잡아가는 방식을 썼다. 반투명의 장막이나 물기 가득한 안개를 얹은 듯 희멀겋게 펼쳐진 배경 속에 기이한 공간과 생물체의 윤곽이 뭉실뭉실 떠돈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곱게 돋은 체모를 닮은 질감을 확인할 수 있다. 모호한 듯 노골적이다. 오싹하지만 음침한 기색이 없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묘하게 마음속이 평온해진다.
▲ 강성은 작가의 ‘Before Mountains’(2011년). 얼핏 단조로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작가가 연필로 그어 쌓은 선의 두께를 읽을 수 있다. 2층에는 종이에 얹은 흑연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강성은 작가(34)의 그림을 걸었다. 종이 위에 끈덕지게 연필 선을 그어 올려 형성한 산야의 정경이다. 물기 없이 그려진 이미지인데 곳곳의 경계가 번져 있다. 작가는 “깊은 밤 고속버스에 앉아 창 너머로 바라본 공간의 질감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다시 보니 멍하니 보는 둥 마는 둥 흘려보낸 심야 도로의 창밖 풍경 그대로다.
3층 널찍한 벽면을 차지한 김정욱 작가(46)의 그림 역시 흑백 이미지다. 한지에 먹으로 그린 형체들이 연상시키는 바가 괴이쩍다. 미국 로스웰 공군기지의 외계인 해부 사진, 공포영화 ‘링’이나 일본 괴담만화 책에서 본 산발의 소복 요괴…. 작가는 벽에 “지긋지긋하면서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고 적어놓았다.
▲ 서민정 작가의 ‘먼 길’(2016년).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나선 개의 여정을 상상해 그린 연작 중 일부다. 꼬마 때 절에서 구경했던 탱화의 야릇한 디테일을 떠올리게 하는 김정향 작가(35)의 장지 채색화, 먹과 분채로 숲길을 여행하는 개의 모습을 표현한 서민정 작가(34)의 그림도 인상적이다. 출구를 나서며 큐레이터에게 “참여 작가 중 2명은 유난히 준비가 부족했던 듯하다”고 하니 “같은 생각을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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